악마(자본주의)와의 거래
생각해 보면 도깨비와의 씨름을 겨루는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신적 존재와 씨름 대결을 벌인 인간의 이야기. 그 대결에서 승리한 인간은 보통 복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벌인 일화가 떠오르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리비아의 거인 안타이오스도 생각난다. 자신의 땅을 지나는 모든 사람에게 씨름을 청했다는.
이 작품 속의 도깨비는 편의적으로 그렇게 지칭하고는 있지만, 확정적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오히려 도깨비라는 존재를 의심하는 편이다.
|| 그 와중에도 의문이 들었다. 이거 정말 도깨비인가? 사실 도깨비가 아닌데 아무렇게나 묶어서 도깨비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 || p. 57
겉모습만 보면 확실히 우리가 알고 있는 도깨비와는 다르다. 짚으로 만든 우비 정도로 도깨비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개비 따위가 붙은 몸은 하수구에 사는 괴물처럼 느껴진다. (정세랑 작가는 이렇게 생경하고 기괴한 비주얼을 자주 만들어낸다. 어찌나 강렬한지 오히려 최영훈 작가의 그림이 못 따라오는 느낌)
만약 도깨비가 맞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알던 도깨비와는 달라진,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도깨비와 같은 전통적 문화가 제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있던가. 우선 청기와 주유소만 해도 그렇다. 기와지붕을 얹은 주유소라니. 그것은 전통건축물의 흉내만 내고 있는 근대건축물이다.
|| 해체 공사가 시작되었고, 청기와주유소는 기와를 벗기자마자 볼품없는 콘크리트 건물로 변했다. || p. 22
근대화 혹은 자본주의는 그렇게 괴물처럼 우리에게 왔다. 원래 우리 것이 아니던 것이 원래 우리 것이었던 것처럼. 순박하고 귀여운 도깨비와의 씨름은 이제 없다.
이야기의 결말을 2019년(초판 발행일 기준)으로 본다면 3대에 걸쳐 보장받은 시간이 8년 빠지는150년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얼추 조선시대 개항 시대와 일치한다. (강화도 조약은 1876년에 맺어졌다. 점장님의 고조할아버지는 당시 마포 나루의 지게꾼이었다.)
사실 이건 자본주의라는 악마와 계약을 맺는 위험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 계약의 핵심에는 젊은이의 육체가 있다.
부와 성공을 지속시키기 위해 노년의 남자는 젊은이의 힘을 필요로 한다. 가진 게 없는 젊은이는 손해볼 것 없는 그 기회를 받아들인다. 도깨비 따위 필요없는 세상이 정상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도깨비를 만나기를 바라게 된다. 그 바람을 이루기도 전에 육체의 젊음이 쇠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말이다. 젊음은 그런 식으로 팔려나간다.
도깨비가 보장해주는 50년은 청년의 젊은이가 노년에 이르는 동안의, 생산 활동을 하는 동안의 기간이다. 돈을 만들어내는 기간인 것이다. 도깨비는 영생을 주지는 못하지만 달콤한 성공을 안겨준다.
그 성공에 도취된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씨름을 하고 싶어진다.
|| 안온하게 이어지는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매일 밤 도깨비와 씨름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p. 75
19세기말 조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기간동안 우리는 그렇게 젊은이들의 육체를 쥐어짜서 살아남은 건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도깨비를 완배지기로 넘기면서 신경질적으로 외쳤던 ‘나도 좀 살자!’라는 외침이 씁쓸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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