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과 정착, 돈과 마음의 문제
원작 논픽션이 하우스리스 노인의 빈곤 문제를 다뤘다면 영화는 사람의 삶 자체를 유목민에 비유한다.
한때 지구를 호령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공룡들처럼, 사람도 언젠가 그렇게 사라지고 말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은 영원히 살 것처럼 '엠파이어'를 짓는다. 결국 살아남는 건 산업 자체일 뿐 인간은 부속품처럼 대체된다. 실제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사랑과 기억,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지만 산업 앞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 펀은 방랑생활을 자처한다. 그녀에게 고여있는 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석고 공장과 옛집처럼 말이다. 슬픔에 머물러 서서히 죽게 될까봐 그녀는 다시 길을 떠난다. 자연은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 그래서 살아있다. 노매드는 자연을 닮았다.
영화는 그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말하지만, 논픽션에 나왔던 노매드들이 그 소릴 들었다면 코웃음을 치지 않을까. 영화 내적으로는 근사한 말이지만, 현실은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다. 펀도 결국 엠파이어(혹은 아마존)의 부속품으로 일해야만 방랑 생활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논픽션은 노매드를 다루고 있지만, 간절히도 정착을 지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방랑을 선택한다는 말은 정착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책이 돈의 문제였다면, 영화는 마음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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