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도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DC에 비하면 그동안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제임스 건이 이끄는 앞으로의 DC가 마블만큼의 성과를 올릴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많은 팬들의 응원을 받고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여지껏 DC영화가 마블 영화보다 못 나가는 게 퍽 나쁘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좋기까지 했다. 나는 마블과 DC의 히어로 모두를 좋아한다. 하지만 오히려 마블의 승리에 아쉬움을 느끼고, DC의 실패를 흥미롭게 보게 될 때가 있다. 양쪽의 장단점이 분명한 탓이다.
문제는 세계관이다. 마블은 세계관을 제대로 구축했는데 DC는 그러지 못했다. 계속 세계관을 리뉴얼하며 삐걱거리고 있다.
세계관 구축에 성공한 마블은 개별작품 보다 전체 세계관이 중요해졌다. 모든 작품이 동반 상승하는 이점이 있지만, 개별 작품의 완성도가 저하되는 걸 피할 수 없다. 모든 작품이 한 페이즈의 결말에 해당하는 ‘어벤져스’ 영화를 위한 전초전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뒤이어지는 작품을 염두해 두고 힘을 분배해야 하다보니, 어떤 작품은 다음 작품으로의 연결고리 정도의 역할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는 디즈니 플러스로 마블 작품들의 스핀오프가 난립하면서 더 커진 문제다.
그래서 마블 영화에선 감독이 누구냐가 (일반 영화들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 세계관에 흡수되어 감독의 개성이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감독이 튀는 걸 경계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히어로 영화라 해도 세계관이 중요하지 않던 이전 시대에는 개별 감독의 개성을 맛보는 재미가 있었다. 팀 버튼의 배트맨과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배트맨’이라는 하나의 히어로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똑같기가 더 어렵다. 이안 감독의 〈헐크〉와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 리턴즈〉는 (망했지만) 흥미로운 해석의 좋은 예다. 팀 버튼이 만들려다 엎어진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 테스트 영상을 보면, 도대체 어떤 영화가 나왔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런 면은 사실 마블도 가지고 있던 미덕인데, 샘 레이미 감독이 만든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마크 웹 감독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 그리고 현재 존 왓츠 감독의 시리즈까지 같으면서도 달라지는 변화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과거에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존 맥티어난의 〈다이하드〉와 레니 할린의 〈다이하드2〉는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비슷한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오우삼이 만든 2편은 어찌나 튀는지!
리들리 스콧이 창조한 〈에일리언〉은 제임스 카메론과 데이빗 핀처, 장 피에르 주네를 거쳐 다시 창조주의 손으로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다양한 탐구의 대상이 됐던가.
제임스 카메론은 자신이 속편에서 창조한 캐릭터를 데이빗 핀처가 다 죽여버려서 언짢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뒤를 생각하지 말고 다 쏟아부어야 재밌는 게 당연하다. 세계관보다 개별작품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요즘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무조건 세계관으로 묶을 생각만 한다. 마블의 세계관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이언맨〉이라는 개별 영화의 성공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007 영화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마틴 캠벨이 연출한 〈골든 아이〉다, 라는 고백은 얼마나 내 취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도 그런 의미에서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의 해석에 이은 그만의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다음 배트맨은 어떤 모습일지, 다음 조커는 또 얼마나 미친놈일지 기대된다.
현재 마블은 이런 유연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블 유니버스에서 히어로는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된다. 그래서 팬들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팬들도 유연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관으로 모두 묶여있는 바람에 갑자기 개별 캐릭터가 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멀티버스가 열렸음에도 운신의 폭은 오히려 적어졌다. 아니, 까다로워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DC까지 세계관에 올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건 마블만으로 충분하다. 그런 이유로 DC 영화가 계속 (적당히) 망했으면 좋겠다. DC의 실패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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