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성격도 조금은 변하기 마련인데 아직도 필자가 힘들어하는 것 중 한 가지는 (가족이나 절친들을 제외한) 그다지 가깝지 않은 타인이 베푸는 호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닥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지인에게 선물이나 세심한 배려 등을 받게 되면 반갑고 기쁘기보다는 부담을 느끼는 편이라 그것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어떤 방식으로 둘러서라도 꼭 다시 갚아야 마음이 편하곤 했다. 예를 들어 얼굴만 알고 그다지 친하지 않은 아이 친구 엄마가 커피 교환권을 보내면 기분이 좋기 보다는 언제 이걸 기분 나쁘지 않게 적절하게 갚아야 하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 필자를 보고 가족이나 절친들은 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냐고, 보답을 하건 말건 그건 나중 문제고 그냥 순수한 호의를 편하고 기분 좋게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충고하지만 별 것 아닌 듯한 그 일이 나에게는 그렇게 편하게 여겨지지가 않았다.
국민 모두가 수험생을 둔 학부모의 마음으로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모든 일상적인 친목활동을 멈춰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2021학년도 수능시험을 일주일 남겨두고 코로나 19 신규 확진자는 600명을 육박했고 급기야 교육부 장관은 국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그 뉴스를 보고 찐 수험생 학부모인 나의 마음은 복잡 미묘했다. 코로나 고3이라고 온 나라의 동정을 받는 것도 모자라 우리의 안위를 위하여 모든 국민들에게 수험생 학부모 마음을 강요하며 일상의 자유에 대해 간섭한다는 게 어불성설처럼 느껴졌고 여간 씁쓸하고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역시 나는 타인의 호의에 어색한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하지만 얼음장 같기만 했던, 타인에 대한 나의 깍듯함과 거리감은 이미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이웃과 친구들이 산타클로스처럼 매일매일 직접 구운 쿠키, 찹쌀떡, 초콜릿, 영양제, 과일 등을 우리 집 문고리에 슬며시 걸어두고 사라졌고, 언택트시대인 만큼 SNS로 수많은 선물교환권이 날아들었다. 수험생의 존재만으로도 심기 불편할 우리 집에 행여나 방해가 될까 사회적 거리를 둔 채 평상시 연락도 삼가며 멀리서 지켜보며 걱정만 하다가, 밤 사이 몰래 다녀간 요정처럼 선물과 편지만 놓고 사라진 따뜻한 사람들...
이제껏 나는 타인의 호의에 대한 진심을 쉽사리 믿지 않는 차가운 가슴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무소식조차 그들의 크나 큰 배려였음을... 그 배려와 지금의 응원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느끼게 된 지금,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타인의 배려와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일 수 있는, 조금 덜 깍듯하지만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이 된 듯 하다.
수험생과 그 가족이 무슨 벼슬도 아니고 모든 국민에게 학부모의 마음을 강요할 권리도, 국민의 일상을 제한할 하등의 명분도 없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인적이 드물어져 멈춰버린 이 도시의 모습은 이미 국민들의 따뜻하고 진심 어린 배려를 느끼게 해 준다. 서로를 위해 한 명도 빠짐 없이 마스크를 쓰는 국민,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내가 얼마나 행운아인지를 알기에, 더 이상은 give&take를 먼저 생각했던 인정머리 없는 깍쟁이로는 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