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imum Jul 09. 2024

기어이 나를 쓰게 만든 책

 그의 작품은 너무도 깊어서 흥분에 겨워 책을 들었다가도 얼마 안 가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겨워 완독하지 못했던 작품들도 많았고, 완독했더라도 그 깊이를 제대로 헤아려 품기 어려웠습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심오한 작품 세계로 인하여 거리감이 들다가도 그와 제가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유머와 재치 넘치는 반전 매력을 소유해서인지, 인간 김연수만큼은 유머와 재치 넘치는 학교 선배 같은 친근한 느낌 또한 들었습니다. 그의 소탈하고 친근한 매력을 더욱 담뿍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에세이집을 읽는 것입니다.

그는 에세이 『소설가의 일』 에서 글쓰기를 꿈꾸기만하고 우물쭈물 주저하고 있는 예비 작가들의 하드 트레이너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글과 문장을 사랑하지만 감히 자판에 손을 얹을 재능도 용기도 없는 저에게 김작가는 쉽고 재밌고 편안하게 소설가의 일과 영업비밀(?)이 무엇인지 자세히 가르쳐주었고 씹어도 씹어도 잘 넘어가지 않는 먹먹한 한 덩어리 숙제를 던져주었습니다.

 늘 글에 대한 동경과 열망을 느끼면서도 재능을 탓하며 노력하지 않고 얄팍한 SNS에만 몰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나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습니다. 글을 쓰지 않기 위해 즉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한 가장 편리한 변명은 바로 재능을 들먹이는 것이라고 따끔하다 못해 쓰라린 충고를 합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게으름은 자기 자신을 얕보는 정신의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재능이 없음을 핑계 삼아 게으름만 피우면서 하루하루를 하릴없이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것을 올곧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세상에 인정받고 대우받을만한 것들만을 좇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바쁜 일상을 핑계로 투덜거리며 도전의 문턱에서 매번 쉽게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살다 보면 커밍아웃이 필요한 순간이 옵니다. 세상에 고백하지 않고는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아 견딜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언젠가는 나 자신이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나를 받아들이고 세상에 공표해야 할 날이 옵니다. 그런 타이밍을 맞이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그것을 잘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부인하고 거부하느냐에 따라 삶은 180도 달라집니다. 저 또한 재능과 일상을 핑계로 진정한 저의 꿈과 정체성을 마주하지 못하고 늘 도망 다녔습니다. 누군가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누군가는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싶어서, 누군가는 남들을 누르고 그들에게 대접받고 싶어서 제각각의 이유로 자신의 진짜 모습과 꿈을 부인하며 살아갑니다. 운 좋게도 커밍아웃이 필요한 그 순간을 맞는다면 과감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이데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 영혼의 키는 훌쩍 커질 것이며 상처는 치유될 것이며, 구멍 뚫린 삶은 충만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글을 사랑하지만 제대로 써보지도 않은 채 비평이 두려워 우물쭈물 언저리에서만 맴돌던 저에게 김작가는 이젠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걱정은 저리 치워버리고 무작정 덤벼보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글을 쓰든, 그 어떤 일을 하든 결과가 어떠하든 노력하고 도전하는 과정은 나의 일부를 완성한다고...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 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타인의 글들은 내겐 너무 완벽해 보여 감히 자판에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차일피일하고 있던 저에게 그 어느 위대한 작가도 한 붓에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고, 초고의 토사물에 대한 역겨움을 딛고 그것을 잘 치우고 다듬는 것이 작가가 평생 동안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토닥여주었습니다. 아직도 앞날이 뿌옇기만 하지만 이 한 권의 책이 천근만근이던 저의 손가락을 자판 위에 올릴 수 있게 해 주었고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우리의 노력과 무관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문장이 쓰이느냐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우리는 결과가 성공이기를 간절히 바라죠. 결과가 아닌 시도와 과정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진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죠. 이 뻔하고 불편한 진실을 깨닫는데 무려 40년 이상이 걸렸지만 저는 결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깨달았다는 그 사실이 중요할 뿐입니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꿈에 가 닿으려는 노력, 질 수밖에 없는 이 인생게임에서 기를 써서 발버둥이라도 쳐보는 노력이 우리의 영혼에 진실한 문장을 써 내려갈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이전 05화 나의 상처는 나만이 치유할 수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