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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Nov 03. 2018

『청설』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없어도

『청설』, 2009, 청펀펀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네 MSN 메신저 주소를 알려줘."


 양양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 티엔커는 까맣고 초롱한 눈망울을 깜박이며 수화로 양양에게 묻는다. 지금의 30~40대라면 열에 여덟 아홉 명쯤은 MSN 메신저에 대한 저마다의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모뎀을 이용해 온라인 접속을 해야 했던 PC통신의 시대가 저물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컴퓨터만 켜면 원하는 모든 정보와 사람에 접속할 수 있는 세상의 시작. 그 세상 안에서도 메신저라는 녀석은 컴퓨터 화면의 좌측 하단에 자리 잡은 채 깜박깜박 박동하며 딱딱하고 네모난 기계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심장처럼 느껴졌다. 대화 상대 목록에 온라인 상태임을 의미하는 녹색 옷을 갈아입은 아이콘들이 많을 때면 그들과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따뜻함이 느껴졌고, 은근히 로그인이 기다려지던 대화 상대가 말을 걸어올 때면 그 깜박임 따라 내 가슴도 두근거렸던 기억...

 모니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양양이 메신저에 로그인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티엔커의 모습은 십수 년 전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지금의 카톡이 가끔은 벗어나고 싶은 차가운 족쇄 같은 느낌이라면 그때의 메신저는 사람의 체온과 두근거림을 전해주는 따뜻한 손깍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따뜻한 손깍지 같은 소통의 수단은 바로 수화다. 티엔커와 양양은 이웃집 피아노 소리, 거리의 소음, 오토바이 소리 등 일상의 소리들을 BGM 삼아 영화 내내 오롯이 손으로만 대화한다. 그들 사이에는 말도 소리도 없다. 비장애인인 평범한 관객들은 영화 내내 수화와 텍스팅만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말과 소리 없이 완벽한 교감을 나누기는 힘들 것 다고 치부해 버릴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상대방을 좀 더 알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말)를 나누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티엔커는 양양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 소리나 말이 아닌 그녀의 언어인 수화를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에 대해 더 알기 위해 눈빛, 행동, 일상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고민하고 염려한다.

 들을 수 없고 말하지 못해서 소통의 과정이 지난하고 자꾸만 오해의 길로 빠지기도 하지만 진심은 결국 더욱 아름답고 완벽하게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보여준다. 청각장애인 수영선수인 언니의 뒷바라지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양양을 바라보며 티엔커는 말한다.


네가 널 안 챙기니까
내가 네 생각만 하게 되잖아.

 그렇게 티엔커는 언니를 위해 자신의 꿈은 버린 채 이리저리 물새처럼 뛰어다니는 양양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언니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되어버린 양양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 꿈으로 이르는 길에 기꺼이 함께 한다. 그러나 동생의 헌신적인 희생이 가슴 아픈 언니 샤오펑은 티엔커를 사랑하면서도 자신 때문에 주저하는 양양에게 이야기한다.


물새는 계절이 바뀌면 날아가.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한 곳에 묶여있지 말고.
언제가 네가 날 떠나서
자유롭게 날아다닌다면
너무 기쁠 거야.
나도 혼자 할 수 있어.
장애인 혼자는 안된다고 하지 마.
아빠가 그러셨잖아.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나 수영 포기 안 해.
너도 그 사람 포기하지 마.

 성실하고 부지런해서 늘 총총 뛰어다니며 누구보다 언니를 사랑하는 큰 눈망울을 가진 양양이라는 사랑스러운 물새는 이제 언니의 꿈을 놓아주고 자신의 꿈과 사랑을 찾아 날아오를 수 있을까?



 티엔커와의 사랑, 샤오펑과의 우애. 이 두 가지 사랑에는 소리도 말도 없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진심을 전하며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한다.


사랑과 꿈은 기적 같아.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없어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거든.

 <말할 수 없는 비밀>, <나의 소녀시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대만영화의 전매특허인 첫사랑 시리즈의 시작점이라 불리는 이 영화 <청설>은 이번 재개봉을 통해 관객들을 90년대의 추억과 청춘에 대한 그리움으로 촉촉하게 적셔 줄 것이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샤기컷의 티엔커와 카고 팬츠에 쫄티를 입은 양양의 다소 촌스러운 모습마저 눈부시게 싱그럽다. 풋풋한 청춘의 사랑이야기에 가슴 뛰기에는 세월 속에 건조되어 딱딱해져 버린 나의 감성이 안타까웠지만 왠지 모르게 극장을 나서는 가슴속이 왜 그리 개운한지... 마치 2시간 동안 스파를 다녀온 듯 가만히 좌석에 앉아 스크린 속 티엔커와 양양이 뿜어내는 순수 세포 재생 레이저를 쫘고 나니 굳어 있고 뭉쳐있던 감성 근육들이 조금은 몰캉해진 것만 같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던... 바람마저 보드랍게 느껴지는 멋진 가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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