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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Nov 26. 2018

『저니스 앤드』 모두가 지는 게임

『저니스 앤드』, 2017, 사울 딥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퀴퀴한 악취, 질척이는 땅 위에서 철퍽거리는 군화소리, 찍찍거리며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쥐들... 영화는 처음부터 불편했다. 화면은 어두침침하고 인물들의 표정 또한 어두웠다.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기에, 더군다나 6.25도 아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최전방의 참호가 배경이기에 낯설고 불편하고 답답했다.

음식이든 예술이든 편식은 몸과 마음에 해롭다는 걸 잘 알기에 장르를 가리지 않는 폭넓고 세련된 문화취향을 갖고 싶지만 늘 눈이 먼저 가고 손이 먼저 가는 영화는 따로 있다. 깊은 울림을 주었던 전쟁영화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전쟁영화가 개봉하게 되면 왠지 극장으로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내게 전쟁영화는 질기고 두터운 껍데기 때문에 좀처럼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괴생명체와 같은 불편하고 찜찜한 그 무엇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군대와 전쟁에 대해 문외한을 넘어 거의 일자무식 수준이기에 이러한 불편함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번에는 왠지 코 앞에서 그 불편함의 실체를 맞닥드려 그 근원을 파헤쳐보고 싶은 호기심에 일부러 작정하고 이 영화를 선택했다.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는 스탠호프 대위(우)와 오스본 중위(좌)

 1918년 3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 북부 프랑스 생캉탱의 영국군 전선 최전방의 어느 참호. 언제 독일군의 기습 공습이 개시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스탠호프 대위가 이끄는 C중대가 이곳에 배치된다. 중대장인 스탠호프 대위는 중대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과 전쟁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다스리기 위해 술에 의지한다. 오스본 중위는 중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중대원들과 스탠호프 대위를 아우르며 살뜰히 챙기는 인간미 넘치고 믿음직한 인물이다. 이제 막 8주 군사교육을 마치고 중대에 배치된 신참 장교 롤리 소위는 누나의 정혼자이자 오랜 친구인 스탠호프 대위와 함께 하고자 일부러 최전선에 배치를 자원할 정도로 용기와 패기가 있는 청년이다. 자신을 반길 줄 알았던 스탠호프 대위는 오히려 그의 갑작스러운 배치를 불편해하는 듯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롤리와 재회하게 된 스탠호프는 입대하게 되면 꼭 자신을 찾아오라며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예전의 그가 아닌 불안과 공포로 떨리는 눈빛을 감출 수 없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영화는 독일군의 기습공격 직전 4일간 최전방 참호에 배치된 한 중대, 그중에서도 이 3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패기 넘치는 롤리 소위

 어둡고 답답한 화면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두껍고 질긴 껍질을 비집어 뚫고 어느 새 영화 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최전방 참호라는 좁고 답답한 제한된 공간 속 대사 없고 비중 없는 '군인3'이 된 듯한 착각마저 느끼고 있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덩케르크> 등이 스펙터클하며 화려하고 사실적인 전쟁씬을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는 턱없이 적은 전쟁씬과 잔인함의 디테일을 묘사하지 않고서도 여타 전쟁영화들과는 또 다른 강한 흡인력과 실재감을 던져 주었다. 무엇보다 전쟁 속에서 변해가고 망가져가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중대의 병사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마치 관객이 그곳에 함께 있는 듯 고스란히 전해진다.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던 남자의 눈동자는 촛점을 잃어가고, 모두가 의지했던 믿음직했던 남자는 한순간 무상하게 스러지고, 패기와 젊음으로 눈부시게 빛나던 남자의 얼굴은 무채색으로 바래져버린다. 탄탄한 원작(토니상을 수상한 동명의 희곡), 사울 딥 감독의 절제되고 탁월한 연출, <레버넌트>와 <컨택트>에서 화면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독특한 사운드를 선사해주었던 힐더 구드나로티르 음악감독까지 합세한 데다 내로라하는 세 배우의 연기력마저 폭발했으니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전율은 당연하리라. 결국 전쟁영화나 어려운 예술영화에 고개를 돌리고 마는 편협한 문화취향을 갖게 된 이유는 깊이 있는 작품의 중심을 향해 뚫고 들어갈만한 내공이 부족했기 때문일 뿐아니라 그 깊이와 울림을 떠안는 버거운 일을 피하고만 싶은 얄팍하고 나태한 멘탈 때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극장을 나서면 휙 날라가 버리고 마는 가볍고 긍정적 정서를 전해줄 작품을 선호하였고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미쟝센 즉 영화의 겉모습에 집착하였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영화 속 스탠호프 대위는 계속되는 전쟁을 겪으며 불안, 공포, 책임감과 중압감으로 인해 끔찍한 환각(온몸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는)과 불면,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그래서 술에 의지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오스본 중위는 가련한 스탠호프의 얼굴을 그의 품성만큼이나 따스한 손으로 감싸며 아기를 재우듯 토닥인다. 그의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신경안정제 삼아 스탠호프는 아기처럼 평화롭게 잠이 든다. 이렇듯 오스본이라는 존재는 스탠호프에게 그 어떤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보다도 강력히 작용한다. 그렇게 스탠호프에게 오스본은 끔찍한 전장에서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나눌 수 있고 가슴 깊이 신뢰할 수 있으며 진심을 터놓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진실한 친구였다. 이토록 따스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그 따뜻한 손으로 이토록 차갑고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고 또 그 지옥 속에서는 인간들끼리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 아이러니라니...


전쟁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거야.


 부중대장으로서 위아래를 아우르며 중대장과 중대원들을 토닥이며 훌륭한 중재자와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며 가혹한 현실을 잘 견뎌내는 것처럼 보이는 오스본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중대에서 가장 ‘정상’처럼 보이는 오스본도 그렇게 계속 되뇌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는 참혹한 현실에 대한 반증인 것이다.

절규하는 오스본 중위
지옥 같은 나흘, 그들의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상이 전쟁이고 전쟁처럼 참혹한 현실도 있다. 하지만, 전쟁은 그 어떤 참혹한 일상과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공포이자 비극이다. 극한의 불안과 공포 속에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이란 승자는 없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모두가 패자일 수 밖에 없는 세상 가장 어리석은 게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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