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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Dec 20. 2018

『그린북』 낯설지만 아름다운 당신의 품위와 태도

『그린북』, 2018,  피터 패럴리

 어린아이가 난생처음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보았다면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도로를 사이에 두고 셜리와 흑인 노예들은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차림을 한 채 날렵한 맵시를 자랑하는 푸른색 캐딜락에서 내리는 셜리 그리고 건너편 농장에서 밭을 갈던 남루한 차림의 흑인 노예들. 놀랍고 이상하고 신기하고 거북한 시선이 서로에게 날아와 꽂힌다. 셜리는 좋은 집(심지어 카네기홀), 고급차, 비싼 옷을 입고 있기에 흑인사회에도 속할 수 없고 피부색 때문에 백인사회에도 속할 수 없는 외로움을 아느냐고 빗속에서 절규한다.


고장난 차를 수리하기 위해 멈춘 토니와 셜리. 건너편의 흑인노예들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1962년 뉴욕, 허풍과 주먹이 앞서지만 의리와 가족에 대한 사랑, 무엇보다 탁월한 문제해결력(?)을 지닌  이태리 출신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 머리부터 발 끝까지 지성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  8주간의 남부 투어 공연에 셜리를 수행할 운전기사 자리의 면접을 보기 위해 토니는 카네기홀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셜리의 사무실을 방문한다.


두 사람은 카네기홀에 있는 셜리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다


 그 당시 다른 백인들이 흔히 그랬듯 흑인을 멸시했던 토니는 특이한 옷차림을 한 채 왕좌 같은 의자에 앉아 고고한 자세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질문하는 셜리와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더군다나 소소한 시중을 포함한 개인 수행비서 일까지 해야 한다는 셜리의 말에 토니는 주급을 올려주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어쩐 일인지 셜리는 토니를 채용하게 되고 그들은 그렇게 8주간의 남부 여행을 함께 떠나게 된다. 자라온 환경, 성격, 좋아하는 음식, 옷차림, 말투와 억양 삶의 모든 면이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은 상대방의 행동방식과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불편하기만 하다. 토니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최선의 결과를 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셜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품위와 태도가 모든 것을 이긴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런 그들이 과연 이 긴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까?


토니에게 그린북을 전달하는 음반사 직원들


 영화의 제목인 '그린북'은 당시 흑인들이 여행을 다닐 때 백인들에게 차별과 폭행을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로, 숙박업소, 식당 및 규칙을 담아 놓은 가이드북을 말한다. 음반사 직원들은 여행 출발 전에 토니에게 이 그린북을 전하고 그 책을 따라 길을 찾고 숙소를 찾는다. 토니 또한 그린북을 따라 그때까지는 몰랐던 흑인에 대한 차별과 불의에 눈뜨게 된다. 셜리의 연주를 지켜보고 매료되어 버리는 토니의 표정, 홀로 밤마다 테라스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외롭게 위스키를 마시는 셜리를 바라보는 토니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셜리에 대한 동경과 공감,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남부로 갈수록 더욱더 극심해지는 인종차별의 현실을 몸소 처절하게 경험한다. 남부의 몰상식한 백인들은 겉으로는 예술가로서 셜리를 존중하는 척 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광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셜리와 같은 공간에서 식사도 할 수 없고 같은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으며 그것이 그들의 규칙이라고 우긴다.


남부의 백인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셜리트리오


 북부보다 인종차별이 더욱 심한 남부 투어는 사실 셜리가 일부러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해요.


셜리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항의하는 토니


 그 길이 얼마나 험하고 상상도 하지 못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을 알기에 토니의 주먹과 패기, 임기응변 능력이 필요했고 그를 선택했던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차별과 부당한 대우, 사고들을 뻔히 예견하면서도 예술의 힘으로 맞서고 세상과 사람들의 편견을 변화시키고자 도전했던 셜리의 용기는 세속적이고 아무 생각 없이 차별을 일삼았던 자신의 가치관을 부숴버리고 불의에 맞서면서 사력을 다해 보스를 지키는 토니의 용기와 닮아있다. 수많은 위기상황 속에서도 토니가 끝까지 셜리를 지켜낸 것처럼, 투어가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토니를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춰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한 셜리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하는 장면은 웃음 머금은 훈훈한 감동을 안겨준다.

 1960년대의 뉴욕, 시대와 도시가 가진 독특한 매력을 뿜어내며 영화는 첫 장면부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너무나 다른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마음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처럼 재즈와 클래식, 블루스, 쏘울 등 장르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음악이 조화롭게 영화 내내 흘러넘친다. 이 배역을 위해 10kg을 증량해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이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고 모텐슨의 연기는 가히 놀라울 뿐이다. 눈빛 하나, 손 짓 하나, 말투 하나까지 거칠지만 의리와 정으로 똘똘 뭉친 능청스러운 떠버리 토니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마허샬라 알리 또한 뛰어난 재능과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아우라 뒤에 감춰둔 외로움을 품은 셜리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특히 그들의 캐릭터에 딱 맞게 설정된 발음과 억양이 놀라웠다.) 패럴리 감독은 본인의 주종목인 코미디의 묘미를 살려 인종차별이란 무거운 주제를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머와 위트로 경쾌하게 풀어낸다.


차이를 넘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두 사람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모두 외모, 국적, 피부색, 성별, 장애 등 인간의 내면이 아닌 외면의 조건을 잣대로 활개 치고 있다. 토니가 아름다운 글귀의 편지를 쓰게 되고 셜리가 프라이드치킨을 포크와 나이프 없이 맛깔나게 뜯어먹는 모습은 서로의 외면이 아닌 내면, 서로의 영혼과 가치관을 존중한다는 표현이자 서로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흔한 스토리를 흔하지 않게 풀어내는 뜨거운 예술의 입김이 겨우내 움츠러든 가슴에 훅하고 따뜻한 감동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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