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 라멘샵』 , 2018, 에릭 쿠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긴 호흡의 여행을 하다 보면 현지 음식이 비교적 입에 맞고 맛이 있을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한식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몇 년 전 스페인 여행 중 끓여 먹었던 김치찌개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스페인 음식은 다소 짜기는 했지만 재료도 다양하고 양념도 맵싸하니 감칠맛이 있어 입에 잘 맞았다. 하지만 여행 7일 차쯤 접어들자 마음 한 구석에서 한식 생각이 스멀스멀 꿈틀대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방이 딸린 숙소를 잡았었기에 그날 저녁에는 밥을 해 먹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에서 공수해온 (서울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김치찌개 레토르트 제품에 숙소 근처 슈퍼에 사 온 두부와 파를 넣고 끓인 것이 전부인 보잘것없는 김치찌개였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오랜만에 타국에서 만나는 김치찌개는 우리의 영혼을 울린다. 눈물 한 방울이 찔끔 날 정도로... 이렇게나 음식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소울푸드 드라마'라고 장르를 설명하고 있는 영화 『우리 가족 : 라멘샵』 은 한국인에게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격인 일본인의 라멘과 싱가포르인의 바쿠테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일본인인 아버지와 싱가포르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마사토(사이토 다쿠미 분). 그는 아버지, 삼촌과 함께 일본 소도시에서 제법 인기 있는 라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무뚝뚝한 아버지와는 이렇다 할 대화도 많이 나누지 않는 데면데면한 사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어머니가 남긴 일기장과 사진, 외삼촌과 주고받은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 부모님의 흔적과 어머니의 가족 그리고 어머니 나라의 음식을 만나기 위해 싱가포르로 떠난다.
마사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싱가포르에서 처음 만났다. 젊은 시절 싱가포르에서 가이세키 요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던 마사토의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바쿠테 맛집을 찾아다닐 정도로 싱가포르 음식을 좋아했다. 어느 날 유명한 바쿠테 맛집에서 식당 주인의 딸인 어머니를 만난다. 그들은 첫눈에 호감을 느끼고 조금씩 가까워진다. 아버지는 식당이 쉬는 날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식당을 열고 계란말이, 회, 메로구이 등 소박한 일본 가정식을 대접한다.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하고 맛있게 그 음식들을 즐긴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가까워지게 하는 매개체 또한 음식이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외할머니의 거센 반대로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의절하게 된다. 아픔을 간직한 채 일본에서 마사토를 키우던 어머니는 가족들과 미처 화해하지 못한 채 마사토가 10살 때 병으로 죽는다. 영화는 국가와 가족의 아픈 역사로 인해 등을 돌린 가족이 어떻게 화해를 이루어가는지를 음식을 통해 잔잔하게 전한다. 무뚝뚝하지만 마음만은 진국인 아버지와 같은 음식 라멘, 몸과 마음의 허기를 따뜻하게 채워주고 감싸주는 어머니와 같은 음식 바쿠테, 그런 둘이 만나 만들어낸 마사토와 같은 음식 라멘-테로서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얼마 전 방송되던 어느 광고가 뇌리에 계속 맴돌았다. 밖에 나가서는 누구에게나 한 없이 상냥하고 친절한 가족이 집에만 들어오면 무뚝뚝하고 짜증만 내는 두 얼굴로 돌변한다는 내용으로, 안과 밖에서 두 얼굴로 살지 말고 가정에서도 가족끼리 서로 배려하며 따뜻하게 행동하자는 내용의 공익광고였다. 가족이란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표현하기는 늘 어색하고 불편한 사이다. 공기나 물처럼 늘 그 자리에 있기에 소중함이 형편없이 평가절하되고 마는 세상 제일 안타까운 관계다. 마사토와 아버지도 여느 부자처럼 서먹하고 데면데면한 사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타고난 성격으로 인한 외적인 모습일 뿐 그 관계의 다리 아래 흐르는 뜨거운 사랑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피곤함과 숙취에도 불구하고 일하러 나갈 아들을 위해 미소국과 흰 밥, 계란말이, 생선구이, 채소 절임으로 정성껏 차려낸 아침밥, 자상한 어머니가 마사토를 위해 몸에 좋은 온갖 약재를 넣고 오랜 시간 사랑과 정성 들여 끓여주었던 바쿠테. 이 음식들은 소중한 아들, 가족에 대한 변함없는 뜨거운 사랑을 의미한다.
마사토가 자신만의 지혜로운 방식으로 외할머니와 화해하고 난 후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을 때, 관객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흉내 내어지지 않는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며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한 입 베어 문 음식이 주는 추억과 그리움으로 인한 먹먹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마사토가 흘리는 눈물의 성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안다.
영화를 연출한 에릭 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몇 년 동안 음식과 우리의 삶에서 음식의 역할에 관심을 가져왔다. 『영국 음식의 역사』의 저자 벤 로저스는 음식은 언어에 이어 문화적 정체성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말했다."라고 했다고 한다.
영혼을 울리는 소울푸드처럼, 우리의 삶에 오랜 세월 변치 않는 진심이 담겨있고 그 진심이 서로 통할 수만 있다면 상처는 분명 치유될 수 있다고... 영화는 나지막이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