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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Mar 31. 2019

『바이스』 , 조용한 그의 화려한 미끼

『바이스』 , 2018, 아담 맥케이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맨해튼 월드트레이드센터와 워싱턴 D.C 펜타곤을 비롯한 주요 관청 건물 등이 민간항공기와 폭탄을 동원한 동시다발적인 테러공격을 받는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부시는 다른 일정을 소화하던 중 보고를 받은 즉시 에어포스원을 타고 백악관으로 이동 중인 상황이었고 백악관에 있던 참모들은 안전한 지하벙커로 이동하여 긴급회의를 하고 있다. 전 세계인과 미국 국민들, 회의에 참석 중인 정부의 주요 인사들마저도 모두 다 두려움과 당혹감에 떨고 있을 때 오로지 그의 눈동자만이 조용히 빛난다. 체니 부통령은 대통령의 재가 없이 군 통수권자로서 추가 테러공격이 대한 대응 명령을 내린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와 슬픔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는 기회를 본다


 도널드 럼스펠드,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10여 년이 지났지만 초강대국인 미국, 부시 행정부 참모들의 이름은 세계정세에 딱히 관심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 수많은 미디어 매체와 인터넷을 타고 세계를 떡 주무르듯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막강한 힘에 전 세계인들이 과다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초강대국의 '부통령'이라는 자리는 대통령 궐위 시 승계 서열 1위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권한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직위이다. 그래서 우리의 머릿속에도 ’딕 체니’라는 이름은 딱 그 정도의 미미한 존재감으로 남아 있었고 그렇게 그는 잊혀지는 듯했다. 영화는 우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딕 체니'라는 인간과 그의 사악한 욕망 그리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고 반성해야 할 미국 역사 상 쓸 데 있는 TMI를 132분 동안 대방출한다.

 예일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해 퇴학을 당하고 전선 기술자로 일하며 술에 쩔어 사고만 치는 청년 체니. 그의 약혼녀인 린은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성으로 성장하지만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서 성공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좌절한다. 남편의 출세를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을 얻고 싶었던 그녀는 무능한 약혼자인 체니에게 앞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꿈도 희망도 없던 청년 체니는 와이오밍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백악관 인턴으로 일하게 되면서 차츰 정치와 권력에 눈 뜨게 된다. 잘 나가던 정치인 럼스펠드를 보좌하게되면서 특유의 과묵함과 성실함으로 인정받은 그는 와이오밍주 하원의원을 거쳐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거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대권을 바라볼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그의 발목을 잡은 다름 아닌 레즈비언인 딸 메리. 고민 끝에 자신의 성공보다는 가족의 행복을 선택한 그는 석유 시추회사 핼리버튼의 CEO로 자리를 옮긴다. 그렇게 정계를 영원히 떠날 것 같았던 그는, 그의 인생과 전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운명적인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아들 부시는 체니에게 부통령으로서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되어달라고 제안한다. 그들의 은밀한 협상으로 인해 전 세계가 얼마나 거대한 소용돌이 떠안고 혼란에 빠져들게 되는지를 아담 맥케이는 프리스타일 연출이라는 그의 개인기를 충분히 활용하여 위트 있게 전달한다.



 딸을 위해 정계를 떠나 핼리버튼의 CEO로 일하게 되면서 댈러스로 이주하여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체니. 그 장면(영화는 중반에도 못 미친 상황)에서 잔잔하고 평화로운 음악이 흐르며 난 데 없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SNL 메인작가였던 아담 맥케이의 재치가 빛을 발하며 관객들의 당혹스러움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탄식으로 바뀐다. 그렇게 체니가 여생을 댈러스의 아름다운 ‘초원의 집’에서 보내고 생을 마감했어야 해피엔드였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아담 맥케이만의 방식으로 재기 발랄하게 전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극 중 화자의 설정이다. 화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온 인물인지는 영화의 중반이 훌쩍 넘어서야 밝혀지는데, 한 정치인의 탐욕과 결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국민의 인생이 좌지우지되고 희생되는지를 그의 인생을 통해 날카롭게 풍자한다. 탐욕에 찌들어 흉측하게 변해버린 체니의 심장을 떼어낸 자리에 깨끗하고 무고한 한 국민의 심장(심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서 싸우다 돌아온 이의 심장)이 이식된다는 설정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감독의 전작 『빅쇼트』와 함께 이 영화에도 인텔리버스터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장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의 지식과 집중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흥미진진한 전개도 화려한 볼거리도 없지만 그 정도의 수고로움쯤은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관객을 끌어당기는 힘이 넘친다. 영화가 끝나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느껴지고, 코드 맞는 친구와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기에 충분한 여러 가지 담론을 선물한다.

 겨우 40대 중반일 뿐인 크리스찬 베일은 (20kg의 체중증량과 5시간에 걸친 분장은 차치하더라도) 청년 체니부터 중장년의 체니를 손짓, 눈빛, 걸음걸이, 특유의 말려들어가는 말투, 그의 지병이었던 심근경색에 철저한 탐구와 고증을 통해 완벽히 재현해냈다. 또한, 에이미 아담스(린 체니 역), 스티브 카렐(럼스펠드 역), 샘 록웰(부시 역) 등 내로라할 배우들의 연기 내공과 실제 인물과의 높은 싱크로율을 확인하는 재미 또한 놓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한가지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 나오는 쿠키영상이다. 자신의 진영 논리만이 옳다고 주장하다 급기야 주먹다짐을 하는 두 사람, 눈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는데도 무관심하게 가십을 떠드는 사람들. 권력이 갈 길을 잃고 눈 앞에서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데도 국민들은 진영을 갈라 서로 대립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그들을 방관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수많은 이민자들과 연방들이 모여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특성상 진영 간의 첨예한 대립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그 쿠키영상을 보며 우리나라 국민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조용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도 정부나 거대 권력이 불의를 저지르거나 국민의 뜻을 거슬러 옳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때 우리 국민들은 적극적인 투표를 통해 준엄하게 심판하고,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롭고 질서 있는 시위로 국민의 뜻을 전달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국민의 아름다운 품격을 확인했다. 정부도 재벌도 그 어떤 '갑'도 영원히 '갑'일 수 없는 세상을 국민 한 명 한 명이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하게 장식된 여러 가지 미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체니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시에게 화려하고 그럴싸한 미끼를 던졌고 부시가 그 미끼를 덥석 물었기에 전 세계 사람들은 그만큼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정치인들(혹은 타인)의 화려한 언변과 밀당, 속임수에 지칠 대로 지치고 속을 대로 속았으면서도 새로운 미끼를 보게 되면 겉면의 화려함만을 보고 그 본질이 (개인의 이익과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더 이상 소수의 이익과 명분 없는 파워게임을 위해 다수의 국민이 희생되고 마는 불의를 두고 보지 말자고, 조금은 수고롭고 귀찮을지라도 사회의 흐름을 정확히 보기 위해 눈 크게 부릅뜨자고, 조금 더 똑똑하고 현명한 국민이 되어보자고...영화는 우리를 타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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