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imum May 11. 2019

『논-픽션』 다시 깨어나는 사유의 촉각

『논-픽션』, 2018, 올리비에 아사야스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알기 위하여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Suffit-il d’observer pour connaîitre?)

“해야 할 권리가 있는 모든 행위들은 정당한가?”(Tout ce que j’ai le droit de faire est-il juste?)

“이성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거가 되는가?”(La raison peut-elle rendre raison de tout?)

“예술 작품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하는가?”(Une oeuvre d’'art est-elle nécessairement belle?)

“권리를 옹호한다는 것은 곧 이익을 옹호하는 것인가?”(Déefendre ses droits, est-ce déefendre ses intéerêets?”

“문화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Peut-on se libéerer de sa culture?)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이하 Bac) 철학 시험의 주제다. 철학 시험은 2개의 주제와 1개의 지문 설명 중 하나를 선택하여 4시간 동안 논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Bac의 합격기준은 20점 만점에 평균 10점 이상이고, 평균점수가 8점 이하이면 불합격으로 유급된다. 합격만 하면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고사로 프랑스와 독일 등 대학이 평준화된 나라에 적합한 시험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수능시험 또한 Bac처럼 자격고사화 해야 한다는 일각의 의견이 있어 먼 나라의 대입자격고사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는 청소년이 써 내려가기에는 버거울 법한 깊이 있는 지식과 교양, 논리가 요구되는 추상적이고 심오한 논술 주제 탓에 더욱 이슈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2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쏟아내는 파리지앙들의 수다 홍수에 게으름으로 메말라있던 사유의 촉각이 촉촉해진다.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전개도 화려한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프랑스어 특유의 억양과 빠른 속도, 순식간에 바뀌어 버리는 폭넓은 대화 주제로 인해 산만함과 불편함을 느낀 관객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2시간 동안 쏟아지는 담론 그리고 사유와 토론의 방식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한편 부러웠다.


디지털(E-book) vs 아날로그(종이책)

픽션 vs 논픽션

안정된 가정 vs 외도

신뢰받는 공적인 삶 vs 부도덕한 사적인 삶


 어렸을 때부터 철학과 토론을 정규 교육과정으로 배우며 늘 예술에 둘러싸여 향유하며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어떠한 주제든 던져주기만 하면 몇 시간이고 토론을 하는 것은 이미 일상의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교육시스템에서 자랐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감성에 치우친 주제로만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문화와 영화 속 그들의 문화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에 가슴이 텁텁해져 왔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고 나서 진지하게 이야기 나눌 상대가 내게는 브런치 지면(그것도 일방적인)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내 쓸쓸해졌다.



 전통 있는 출판사의 편집장인 알랭(기욤 까네 분)은 아름다운 아내 셀레나(줄리엣 비노쉬 분)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겉으로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회사의 디지털 사업 담당자인 로르(크리스타 테레 분)와 외도 중이다. 그는 e-book과 오디오북, 블로그 등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출판업계 한가운데에서 변화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책의 건재를 믿는다. 그는 '인류가 축적해온 글로 된 지식 전체를 인질로 삼아 구글이 사용자들을 광고주에게 판다'고 이야기한다. 로르는 아마존의 개인 맞춤 추천 알고리즘이 그 어떤 비평가보다도 환대받고 있으며 출판업계도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좀 더 공격적으로 디지털 마케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침대는 공유하지만 생각마저 공유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파리지앙답게 이별도 쿨하게 '미리' 준비한다.


 

 유명한 배우인 셀레나는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의 시즌이 길어지면서 일과 삶에 대한 권태와 매너리즘을 느낀다. 그녀는 남편 알랭이 편집을 담당하고 있는 소설가인 레오나르(뱅상 멕켄 분)와 6년째 외도 중이다. 레오나르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소설에 고스란히 옮겨내는 작가로 독자들로부터 아래와 같은 비판을 받는다.


작가가 타인의 삶을 함부로 이용하고 왜곡할 권리가 있는가

경험도 돈이 될 수 있는가

경험은 내 것인가 타인의 것인가


이에 레오나르는 아래와 같이 항변한다


경험은 나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나옵니다.
타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내 것이기도 합니다.
내 인생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형성됩니다.
모든 픽션은 자전적입니다.



셀레나는 레오나르에게 이별을 고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얘기 책에 쓰지 마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의 일>에서 작가 지망생들에게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핍진성'에 대해 언급하는데 핍진성(발음마저 어려운)의 사전적 의미(문학분야에서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핍진성 [ verisimilitude, 逼眞性 ]
서사적 허구에 사실적인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수용하는 관습화 된 이해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소설 창작의 한 방법으로, 구체적으로는 동기 부여나 세부 묘사 등의 소설적 장치를 들 수 있다.

 완성도 높은 소설은 개연성을 넘어 핍진성이 있어야 하는데, 소설가로서 핍진성이 있는 허구를 사실인 것처럼 실감 나게 표현하는 것과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다. 레오나르는 유명 소설가이기에 그가 자신의 경험담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글로 쓴다면 그의 사생활과 연관된 인물과 상황이 가감 없이 그대로 노출될 수 있다. 그로 인해 타인의 사생활과 인권을 침해할 수 있기에 독자들의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그의 집필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알랭은 출판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봐. 실제 일어난 일과 일어날 법한 일을 구분 못하는 건 아닌지...


 영화가 쏟아내는 수많은 담론 속에서 유독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픽션과 논픽션에 대한 고민이자 예술과 재능에 대한 화두다.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이 픽션이고 무엇이 논픽션인지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레오나르는 보여준다. 셀레나와 헤어지고 임신한 아내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게 된 후 레오나르는 과연 어떤 집필 방식을 선택했을까? 경험을 오롯이 써 내려가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을까 아니면 진짜 있을 법한 허구를 만들어냈을까?

 디지털로 변화해가는 출판시장을 바라보면서 알랭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것도 안 변하려면 모든 게 변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결국 '모든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영화의 원제는 <Doubles vies>, 우리말로 바꾸자면 '이중생활'이다. 한 사람의 두 가지 삶, 디지털 vs 아날로그, 논픽션 vs 픽션 등과 같이 ‘Doubles vies’라는 제목은 영화에 등장하는 대립하는 두 가지 가치관을 모두 아우른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우리의 삶 속에서 둘 중 어느 하나를 꼭 선택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기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레오나르의 집필 방식에 대해서도 좋다(옳다) vs 나쁘다(그르다)라고 그 누구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사랑도 이별도 너무도 ''한 프랑스인들의 사랑의 방식에는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지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차가운' 머리로 깨어서 사유하고 토론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는 자꾸만 마음이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이스』 , 조용한 그의 화려한 미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