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레이 베이』, 2018, 마츠나가 다이시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 중 『하나레이 베이』 의 원문을 인용하였습니다.
헝가리에서 세 딸을 키우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 주부 크리스티나 자카브(50)가 ‘다뉴브강 유람선 침몰 사고’ 추모 문화제를 기획하고 진행하여 화제가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피해자 가족과 한국에 우리의 마음을 보여 주자”며 추모제의 날짜와 장소를 올린 글이 SNS를 타고 빠르게 입소문이 났고 지난 31일 한국대사관 앞에 200여 명이 모여 아리랑을 부르며 사망자를 애도하고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한 기자가 그녀에게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헝가리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헝가리 사람들은 이번 사고에 대해 정말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사고가 잘 수습된 이후에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길 고대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제가 한 가지, 부인에게 부탁이 있어요. 이 곳 카우아이섬에서는 이따금 자연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곳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때때로 거칠고 치명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런 가능성과 함께 여기서 살아갑니다. 아드님의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부디 이번 일로 우리 섬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부인 입장에서는 주제넘은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드리는 부탁이에요.
대의가 어떻건 전쟁에서의 죽음은 양측이 각각 갖고 있는 분노나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내 편 네 편 따위는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아드님은 대의나 분노나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하와이의 아름다운 섬 카우아이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아들을 잃은 사치에게 초로의 경찰관은 이렇게 당부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헝가리의 다뉴브강도 하와이 카우아이섬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임에 틀림없지만 누군가에게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픔의 장소로 남고 말았다. 가족(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은 건네는 일은 참으로 어쭙잖은 일이며 피하고만 싶은 버거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허망하고 판에 박인 위로의 말을 하느니 그냥 손을 잡거나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찰관의 말은 묘한 뒷맛을 남긴다. 사치에게도 그 말이 못내 마음에 남았는지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가던 발길을 돌려 하나레이 해변에서 며칠간 머문다. 그녀의 머리와 몸은 아들과 아들의 삶을 이해해보려고, 이 섬을 미워해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치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런 광경을 한 시간쯤 무심히 바라보았다. 윤곽이 잡히는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었다. 무게를 지닌 과거는 어디론가 어이없이 사라져 버렸고 미래는 아득히 머나먼 어두침침한 곳에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의 그녀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녀는 시시각각 이행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주저앉아 파도와 서퍼들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반복의 풍경을 그저 기계적인 눈으로 따라잡고 있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로구나. 그녀는 어느 시점에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에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녀의 슬픔을 가둬버리듯 아들의 유품을 박스에 넣고 닫아버린다. 그 후 매년 아들의 기일이 다가오면 하나레이 해변을 찾아 한동안 머무른다. 낮에는 아들을 앗아가 버린 해변에서 그늘을 찾아다니며 싸구려 비치의자를 펴고 책을 읽고 밤에는 피아노바에서 가끔 연주를 하며 지내는 것이 일상의 전부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추모하고 기억해보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10년 전과 변함이 없이 메말라있다. 머리와 몸은 비록 아들의 영혼과 가까이 있을지 몰라도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아들의 죽음과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는 젊은 나이에 촉망받던 뮤지션과 결혼하였지만 그는 늘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폭력과 외도를 일삼았다.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아들을 낳아 힘겹게 키우고 있던 어느 날 남편은 다른 여자의 집에서 벌거벗은 채 약물 쇼크로 죽어버린다. 남편이 죽은 뒤 피아노바를 운영하며 홀로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아들은 늘 가시 돋친 말만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만 한다.
서핑을 하러 하와이에 간 아들은 새벽에 서핑을 하던 중 상어의 습격을 받아 오른쪽 다리가 잘린 채 새파란 주검으로 돌아온다. 그녀를 조롱하는 미군의 말 그대로 그녀는 그야말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는 비극의 여주인공'이다.
영화는 철저히 스토리가 아닌 캐릭터와 배경에 집중한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그녀의 표정, 몸짓, 태도는 너무나 낯설다. 날벼락과도 같은 비극적인 현실 앞에 초연하고 담담하며 냉정하다. 그녀는 관객에게 쉽사리 감정의 틈을 보여주지 않는다. 눈물도 슬픔도 없고 황망함도 놀람도 아닌... 그녀의 진짜 속내를 어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가족과의 사별과 같은 상실을 온몸과 온 감정을 다 실어 숨김없이 표현해버리는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의 모습은 불가사의 그 자체다. 일본의 중견배우 요시다 요는 감정의 절제와 폭발을 넘나드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원탑으로써 캐릭터가 이끌어가는 수작을 완성시켰다.
하루하루 고단한 인생을 버텨내는 것이 급선무였던 그녀에게 아들과의 관계 개선은 큰 짐이자 사치였다. 제 멋대로 행동하고 인내심과 배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해도 찾을 수 없는 아들을 바라보며 한 숨을 짓고 서먹한 대화만을 나누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랑했지만 미워했기에 안타까움과 회한만 남긴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강인한 여성, 사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무게였다. 그래서 그녀는 슬픔을 피해 10년을 도망 다녔다. 10년 동안 받아들이고 마주 할 수 없었던 크나큰 상실은 아들 또래의 일본인 서퍼 소년들을 만나게 되면서 처절하게 파헤쳐지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난하고 대책 없이 무모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서핑)에는 온 열정을 다 바치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금씩 아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소년 중 한 명인 타카하시가 사치에게 해변에서 외다리 서퍼를 보았다는 말을 하면서 사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린다. 아들의 환영일지도 모를 외다리 서퍼를 찾기 위해 온 해변을 뒤지고 다닌다. 움직일 리 없는 해변의 커다란 고목을 있는 힘을 다해 계속 밀어붙이는 사치. 해변을 방황하는 엄마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외다리 서퍼 타카시의 모습이 순간 관객들의 눈에만 보여진다. 땀범벅이 되어 찾아간 경찰관의 아내를 붙잡고 사치는 말한다.
아들을 싫어했어요. 그래도 사랑했어요.
난 이 섬을 받아들이려 했어요. 하지만 이 섬은 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마저도 내가 받아들여야 하나요?
경찰관의 집에서 10년 동안 찾아가지 않았던 아들의 핸드프린트를 받아 들고 아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아들의 사진을 받아 든 사치가 숙소에 돌아온다.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던 사치가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뜨리고 영혼 깊은 곳의 분노와 슬픔을 끄집어 던져내 듯 방안의 물건들을 집어던진다. 아들의 핸드프린트 위에 자신의 손을 마주 대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군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슬픔의 무게와 깊이를 마주 하게 된 것이다.
어째서 그 시원찮은 서퍼 녀석들에게는 보이고 나한테는 안 보이는가. 이건 어떻게 생각해봐도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녀는 시신안치소에 있던 아들의 유체를 머리에 떠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어깨를 힘껏 흔들어 깨워서 큰 소리로 따져 묻고 싶었다. 얘, 어째서야?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니.라고.
우리는 누구나 미움과 사랑으로 점철된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며 살아간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사랑만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다. 너무도 사랑하기에 더욱 미워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이 맞닿드려야 하는 죽음이라는 일상사를 만날 때 우리는 누구나 '슬픔'이라는 단어를 넘어선 거대한 감정의 파도를 타고 넘어내야만 한다. 많이 미워했으면 미워했던 만큼 많이 사랑했으면 사랑했던 만큼 그 상실의 크기와 깊이는 끝 모를 바다처럼 아득하다.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추모의 기간은 너무나 짧고 우리 안의 상실의 뒤끝은 그 꼬리가 너무나 길다. 누군가는 힘내라고 이제 그만 훌훌 털어버리라고 영혼 없이 충고하지만 그 워딩의 가벼움은 공기를 타고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승화시켜 우리의 영혼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영화는 말한다.
가혹한 세상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가.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인생의 비극 앞에 우리는 하늘은 원망한다. 하지만 이 세상은 자연이다. 헝가리의 다뉴브강도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도 이곳 서울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기구하고 안타깝고 불공평한 이 세상은 조용히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간다. 그 누구에게라도 예외는 없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마주하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긴 시간을 통한 영혼의 성장과 깨달음으로 인해 우리는 치유될 수 있다고...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는 걸까.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 무엇이 어찌 됐건 이 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 일본계 경관이 조용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듯이 나는 이곳에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공평하건 불공평하건, 자격 같은 게 있건 없건, 그냥 있는 그대로.
영화 내내 'Plaisir d'amour'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사치에게는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슬픔과 괴로움이 더 컸기에 그 선율은 더욱 애잔하다. 아들이 죽은 직후 복잡한 감정이 무엇인지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해 무표정한 사치보다는 1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잠자는 슬픔을 다 끄집어내고 박스에 밀봉해버렸던 아들의 유품 속 워크맨을 꺼내어 아들이 즐겨 듣던 이기 팝의 ' The passenger'를 들으며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는 사치의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슬픔을 외면한 채 아들을 찾아 해변을 헤멜 때는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아들을 비로소 만난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속의 사치는 환하게 웃고 있다.
영혼의 치유와 성장에는 기약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인생이란 참으로 얄궂기 그지없지만... 언젠가는 슬픔을 딛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그 날이 꼭 온다는 걸 잊지 말라고 사치는 우리를 향해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