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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Jun 27. 2019

이케아 옷장을 타고 떠나는 패키지 투어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 2018, 켄 스콧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 팝송 마니아였던 오빠의 영향으로 팝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푹 빠져들게 되었다. 매주 빌보드 차트를 줄줄 외울 정도였고 지금 다시 보면 이보다 유치할 수 없을 연출과 미장센을 자랑하는 뮤직비디오를 보며 열광했다. 1년에 딱 한번 받을 수 있는 팝스타 종합선물세트 같은 그래미, AMA 시상식이 하는 날이면 새벽잠을 설쳐가며 본방을 사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케니 지라는 연주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기존의 팝송이라기에는 재즈에 가깝고 재즈에 가깝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팝한, 둘 사이 경계의 날카로운 엣지 위에 위태롭게 서서 이렇게 저렇게 밸런스 맞추고 있는 듯한, 당시 팝계에서 흔치 않은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었다. 어린아이가 색소폰 연주곡을 듣다니 지금 돌아보면 실소가 삐져나온다. 그의 앨범은 몇 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연주곡이었는데 기존의 노래와 가사가 있는 팝 음악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는 실로 신선한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히 그의 앨범을 틀어 놓고 있노라면 그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갖가지 몽상과 상념들이 날개를 펴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린 필자를 몽상가로 만들어버린 Kenny G


 <Songbird>,  <End of the night>와 같은 곡이 방 안에 울려 퍼지면 내 영혼은 이미 수만 킬로를 날아간다. 정확히 어느 나라의 어떤 도시 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한 그 어드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멋진 저택의 테라스에서 나는 선셋을 바라보며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고 서있는 것이다. 내친김에 드론까지 띄워서 멀리서 바라보자면, 살며시 어둠이 내려앉은 그 풍경과 내가 살고 있는 멋진 저택의 수많은 창을 통해 새어 나오는 불빛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지... 게다가 자세히 보니 내 옆에는 왕자님처럼 멋진 묘령의 남자까지 ^^ 바로 이때 멀리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얼른 나와서 저녁 먹어!"

 생선조림과 나물(어른이 된 지금은 찾아다니며 먹을 만큼 좋아하지만 당시의 어린 내가 결코 좋아할 수는 없었던 음식)들로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차려놓으신 ‘정통 한식’ 저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내 머리를 한 대 치며 ‘정신 차려! 여기는 한국이라고!’라며 호통치는 듯했다. 순식간에 날개가 꺾여버린 공상의 여운이 못내 아쉬워 저녁밥을 깨작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린 아자는 자신이 처한 가난과 좁은 세상을 직시한다


 인도 뭄바이에 살고 있었던 소년 아자에게 이케아 카탈로그란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었던 어느 소녀를 몽상가로 만들어버린 케니 지의 음악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학교와 집, 기껏해야 친척집 정도의 좁디좁은 자신의 행동반경을 떠나 상상 속에서나마 자신을 미지의 신세계로 데려다 줄 마법 양탄자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빨래터에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던 아자는 자신의 아빠가 누구인지 늘 궁금해한다.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빈부의 격차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좁고 어두우며 답답한 세상 안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병원에서 발견한 이케아 카탈로그는 그를 멋지고 깔끔하며 알록달록한 색감이 넘치는 가구들이 가득한,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했고 신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키우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지독한 가난의 벽에 막혀 있고 아자는 청년이 되었지만 거리의 마술사, 소매치기 등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어머니의 유골과 수중에 남은 100유로짜리 위조지폐를 품고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파리 드골공항에서 만난 택시기사가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난생처음으로 부자 여행객 대접을 받고 있다는 기쁨에 젖어 기꺼이 어마어마한 택시비를 지불한다.


꿈에 그리던 이케아매장에 온 아자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향하는 곳은 꿈에 그리던 이케아 매장. 운명처럼 그곳에서 아름다운 미국 여인 마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다음날 에펠탑에서 만나기로 데이트 약속까지 잡는다. 숙소에 묵을 돈이 없어 이케아 매장의 옷장 안에서 잠이 들어버린 아자는 이미 런던으로 향하는 트럭에 실려있다. 옷장을 타고 시작된 파리-런던-바르셀로나-로마-트리폴리로 이어지는 아자의 예측불허 세계 모험기가 펼쳐진다.


보다 신선한 볼거리가 아쉽다


 문학,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변주되는 ‘세계일주’라는 다소 클리셰스러운 소재를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했다. 아자의 유년에 필자의 유년을 투영해볼 정도로 그 시작은 좋았으나 우연과 작위가 난무하는 스토리는 일사천리로 전개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한 빈부의 격차, 난민 이슈, 나눔과 기부, 운명과 기회 등 그 가짓수가 좀... 너무 많다.

 맥락 없이 빠른 속도로 휘몰아치는 스토리, 패키지여행을 하는 듯 너무도 뻔한 관광지와 볼거리, 난데없는 뮤지컬 영화로의 전환과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발리우드 춤사위의 등장까지... 세계여행이 영화의 큰 줄기인 만큼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의 정서와 문화, 음악이 차고 넘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어느 한 가지도 머릿속에 잔상을 남기지 못하는 듯한 안타까운 느낌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too much’! 패키지 투어를 다니는 것처럼 빠르고 편리하긴 하지만 손님들에게 한 번에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주고픈 욕심 때문인지 마음속에 특별한 경험과 감흥으로 남지 못한 듯하여 영 찜찜하다.


갑자기 분위기 발리우드


 감독(원작자)의 욕심이 다소 과하긴 했으나 분명한 것은 이케아 카탈로그나 케니 지의 음악처럼 이 영화는 2시간 동안 당신을 이케아 옷장에 태운 채 편안하고 빠른 속도로 세계 곳곳을 날아다니며 일상에 지친 당신의 머리를 식혀주고 상쾌하게 리프레시해줄 거라는 사실이다. 수많은 볼거리와 들을 거리로 완전 무장한 채 말이다. 게다가 영화는 이 이야기가 아자가 고향에 돌아와 선생님이 되어 죄를 저지른 소년들을 선도하는 과정에서 들려주는 과장되고 꾸며진 것이라는 것임을 미리 실토해버리니, 관객의 즐거움과 소년들의 계도를 위한 스토리의 핍진성 상실쯤은 애교로 봐줄 법하다.

 여행과 경험이 한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영화의 메시지처럼 예술 또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움직이게 만든다. 예술작품은 관객이나 독자를 만나고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는 순간 다시 태어난다. 좋은지 싫은지 아니면 그냥 그런지 확인해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무조건 접해보는 것이다. 편협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따위(?) 리뷰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수억의 취향의 개수 중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해두자. ‘이케아 옷장 투어’ 패키지 상품은 분명 세상 풍파에 지친 당신을 즐겁고 편안하고 모실 것이고 세계 곳곳의 다양한 모습과 선한 메시지들을 조화롭게 한다발로 엮어 선사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선생님이 된 아자가 교실에서 수업을 하며 아이들에게 전하는 타고르의 시구는 인생에서는 물론 사소한 갈등의 순간에서도 명답의 진가를 발휘한다.


바다를 바라보기만 해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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