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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Jul 26. 2019

『누구나 아는 비밀』 비밀을 이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

『누구나 아는 비밀』, 2018, 아쉬가르 파라디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전원생활은 아름다운 자연, 맑은 공기, 마음의 평화를 선사한다. 전원주택이나 귀농이 트렌드가 된 이유일 것이다. 도시에 빽빽이 들어서 있는 아파트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시골의 대문은 이웃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귀농생활에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이웃들과의 원만한 관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의 삶보다 불편하고 외롭기에 서로의 도움과 체온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몇 년 전 일어났던 '마을회관 농약 사이다 사건'만 해도 오랜 시간 쌓아온 이웃들 간의 ’정’이 어떻게 순식간에 ‘악’으로 변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웃보다 더 가까운 가족 사이는 어떨까. 사랑과 미움, 기대와 원망이 뒤섞여 있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모두 다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남보다도 못한 가족으로 인해 고통받고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과거에 연인이었던 라우라와 파코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의 한 시골마을,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주인공 라우라(페넬로프 크루즈)는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도착한다. 라우라의 아버지는 소싯적 부유하고 잘 나가가던 마을 유지였으나 돈도 명예도 잃은 쇠락한 노인이 되어버렸고 언니와 형부는 자영업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으며 라우라의 조카인 로시오는 남편과 헤어진 후 홀로 힘들게 어린 딸을 키우고 있다.

 배경이 대도시가 아닌 시골인 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시골마을의 돈독하고 내밀한 이웃과의 관계의 특성이 영화의 서사를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골마을은 물리적으로 매우 좁고 제한되어 있기에 한 가족의 흥망성쇠의 역사와 가십, 숟가락 개수마저 서로 공유한다. 비밀이든 소문이든 삽시간에 퍼진다.

 영화는 30분 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미룬 채, 스페인 시골마을의 풍광은 물론 이웃과 가족들의 모습, 떠들썩한 결혼식과 애프터 파티 모습을 관객들이 지루하게 느끼기 직전까지 느리고도 충분히 보여준다. 스페인 특유의 열정과 낙천적 떠들썩함이 넘쳐난다.


떠들썩한 결혼식 피로연


 계속되는 파티 중에 갑자기 정전이 되어버리고,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은 파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사이 라우라의 딸 이레네가 없어지고, 이내 가족들은 그녀가 납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축제의 즐거움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고 납치범으로부터 딸의 몸값을 요구하는 문자가 날아온다. 가족과 이웃은 물론 하객들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고 라우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딸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동원한다. 이레네는 무사히 엄마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딸의 납치를 확인하는 라우라


 우리는 '공공연한 비밀'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영화의 제목은 '누구나 아는 비밀'. 비밀이 어떻게 공공연할 수 있으며 비밀인데 어떻게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걸까. 여기서 인간의 본성과 비밀의 속성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렵생활시대부터 인간은 공동체의 존속과 본인의 생명의 안위를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적인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갖게 되었다. 유명인들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가십과 소문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그것들에 큰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여기 누군가의 비밀이 있다. 비밀을 평생 혼자서만 간직한다면 그것은 진짜 비밀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비밀의 소유자가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은둔형 외톨이가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람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비밀은 어떤 방식(말, 행동, 태도, 분위기, 정황 등)으로든 당사자를 빠져나가 새어나갈 수밖에 없고 그 순간 비밀은 더 이상 비밀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람들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어떤 공동체에서든 입에 올릴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라우라의 비밀도 마찬가지다. 딸을 잃어버린 라우라는 지금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 비밀을 밝히는 것이 딸을 찾을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비밀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어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동고동락한 가족과 이웃 간에는 많은 이야기와 사건들이 쌓인다. 어떤 일은 잊혀지지만 어떤 일은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가슴 아프고 나쁜 일일 경우에는 마음에 큰 흉터마저 남긴다. 영화는 비밀을 대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를 꼬집어낸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 비밀을 해석하고 이용하고 혹은 묻어버린다. 영화는 물질과 이기심으로 인해 비밀을 이용하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된 서사는 이레네의 납치와 범인 색출이지만 우리가 꼭 주목해야 할 것은 범인을 찾는 일이 아니라 피와 정을 나눈 가까운 가족과 이웃, 연인과 친구들이 서로 할퀴고 망가져가는 모습들이다.


라우라의 가족들


 오프팅 시퀀스에서 성당의 종탑의 깨진 시계 틈 사이로 새가 날아들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의 더께가 쌓인 오래된 성당 종탑 안의 시계는 깨져있으며 벽에는 비밀이 새겨져 있다. 오랜 시간 쌓아온 관계 안에는 그만큼 많은 이야기와 비밀이 쌓여있다. 균열이 생겨 깨어진 관계 사이로 비밀도 믿음도 사랑도 새어나간다. 팍팍하고 거친 세상을 탓해보지만 균열의 변명거리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가까운 이들의 배신에 눈물 흘리는 인간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그만큼 영혼의 균열 사이로 인간의 품격과 윤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유일하게 인간의 품격을 보여주는 파코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얻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모든 것을 잃었지만 희미한 미소를 짓는 파코(하비에르 바르뎀)의 모습에서 인간의 품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크나큰 위안을 준다.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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