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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um Feb 15. 2020

 『결혼이야기』 이별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

『결혼이야기』 , 2019, 노아 바움백

 미국에서 살아봤거나, 미국을 두루두루 여행해본 사람들은 한 번쯤 남들이 묻지도 않을 시시한 고민에 빠진다.


서부가 좋아 동부가 좋아?

LA와 뉴욕 둘 중 어디서 살고 싶어?


 미국을 경험한 누구나 이런 고민을 할 정도로 두 도시는 같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딴판의 날씨와 문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사시사철 눈부신 햇살과 따뜻한 날씨, 널찍널찍한 거리와 집들, 여유로움과 자유분방함이 넘치고 부와 화려함을 대놓고 과시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LA. 사계절이 뚜렷하고 특히나 혹독한 추위와 많은 눈이 내리는 겨울 날씨, 세계 최대의 도시인만큼 복잡하고 밀집된 공간 속에 24시간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며 절제된 세련미를 가진 사람들로 넘쳐나는 뉴욕. 두 도시 모두 이루다 나열할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하지만 두 도시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영화에서 뉴욕은 곧 찰리(아담 드라이버)이고 LA는 곧 니콜(스칼렛 요한슨)이다.


찰리는 곧 뉴욕이고 니콜은 곧 LA다


서로의 다른 점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지만 오랜 시간 함께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단점과 이질감이 더욱 불거져 보일 수밖에 없는 위태로움이 도사리고 있는 관계. 하지만 이것은 니콜과 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커플이나 부부에게도 적용되는 불편한 진실이다.

 LA 출신의 영화배우 니콜은 뉴욕 출신의 천재적인 연극연출가 찰리를 만났고 그녀의 말처럼 그를 만난 지 2초 만에 사랑에 빠졌고 결혼한다. 그녀는 남편의 커리어를 위해 뉴욕에 정착하여 남편의 극단에서 함께 일하고 있지만 승승장구하는 남편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존재는 점점 투명인간처럼 사라져 가는 듯 느껴진다. 그녀는 멀리 있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일 년 중 잠깐 동안 만이라도 LA에 머물자고 말해왔지만 찰리는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면하고 미룬다. LA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된 니콜, 그녀의 출연료를 자신의 극단에 쓰겠다고 말하는 찰리를 보며 니콜은 이혼을 결심한다.



 갈등의 편린들은 먼지처럼 평화로운 일상 속에 켜켜이 쌓인다. 고요히 쌓이는 눈이 어마어마한 무게가 되어 지붕이 무너져내려야 우리는 비로소 그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깨닫는다. 쌓이고 쌓이다 임계점을 넘으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니콜은 이혼을 결심하고 유능하고 다분히 세속적인  이혼 변호사 노라(로라 던)을 만나 합의가 아닌 이혼소송을 진행한다. 노라는 니콜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혼은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희망에 찬 행동이에요.


 화성과 금성만큼이나 다른 뉴욕과 LA에서 온 찰리와 니콜은 겉으로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평범함 부부처럼 보였지만 시간과 일상에 밀려 사랑은 옅어졌고 켜켜이 쌓인 오해와 불만으로 인해 어느새 그들은 각자의 고향만큼이나 멀어져 버렸다. 노라의 말처럼 이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은 다 더 나은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랑했던 이와의 이별...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혼이고 관객들은 감독 덕분에 행복했던 한 부부의 이혼 과정을 현미경을 들이댄 듯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세밀하게, 무너지고 망가지는 그들을 지켜봐야 하기에 관객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배가 된다. 이혼의 과정을 이토록 현실적이게 묘사한 작품이 있었을까.

 이혼은 여타의 이별과는 결이 다르다. 연애를 하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이별이나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사별 등의 헤어짐과는 달리 제도나 서류상으로 완전히 관계없는 사람으로 정리를 해야 하는 이혼이라는 이별은 과정이 길 뿐만 아니라 복잡하고 때로는 진흙탕 싸움이 되기도 한다. 자녀가 있는 경우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양육권, 재산분할, 위자료 등의 차가운 단어 사이에 애틋함이나 미련, 후회 등과 같은 따뜻한 단어들은 전혀 끼어들 틈도 없이, 비정한 갈등의 시간을 견뎌내야 비로소 끝이 난다. 영화는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복잡한 감정을 최대한 가까이서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숨길 수 없는 그들의 감정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대사보다는 그들의 표정, 몸짓에 주목한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쏟아내는 엉망진창인 추악한 말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솔직하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저주의 말들을 퍼붓는 그들의 싸움 장면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 모진 말들을 내뱉으며 두 사람은 격렬하게 싸우지만 이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오열하는 찰리를 보듬고 위로해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니콜이다.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지만 지금은 열렬히 서로를 미워하게 된 상황을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 각 자의 변호사와 함께 만나 이혼 조건에 대한 협상을 벌이는 살벌한 자리에서도 니콜은 점심메뉴를 고르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찰리의 메뉴를 세심하게 대신 골라준다.

  

 뉴욕의 어느 바, 이혼의 과정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찰리가 동료들 앞에서 'Being alive'를 감정에 흠뻑 젖어 부르는 롱테이크 씬.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쓸쓸함과 안타까움과 무상함은 그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인생에서의 가장 큰 슬픔은 대개 사람으로 인한 것들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사람)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는 말처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이별을 하는 우리의 인생은 10%의 기쁨과 90%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Somebody, hold me too close

날 꽉 끌어안아줄 사람

Somebody, hurt me too deep

날 상처 입힐 사람

Somebody, sit in my chair

내 의자에 앉아

And ruin my sleep

잠을 방해할 사람

And make me aware

Of being alive, Being alive.

내가 살아있음을 일깨워줄 사람


Somebody, need me too much

날 많이 필요로 할 사람

Somebody, know me too well

날 너무 잘 아는 사람

Somebody, pull me up short

갑자기 하던 것을 그만두고

And put me through hell

날 곤경에 처하게 할 사람

And give me support

그래도 날 도와줄 사람

For being alive,

내가 살아가도록.

Make me alive.

날 살아가게 만들어줘.


Make me confused

날 혼란스럽게 하고

Mock me with praise

칭찬하며 날 놀리고

Let me be used

날 이용하고

Vary my days

내 삶을 변화시켜요

But alone is alone, not alive.

하지만 혼자는 혼자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찰리가 부르는 이 노래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을 사람,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 나를 칭찬하는 사람, 나를 이용하고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 수많은 성향을 가진 주변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일은 행복하고도 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살아있다는 것(Being alive)'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아니라, 다중인격처럼 그 모든 성향을 다 가진 내가 사랑하는 그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초반 두 사람의 사랑스러운 아들 헨리는 이제 막 글을 읽기 시작했고 아직 더듬더듬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영화 후반 어느새 헨리는 능숙하게 글을 읽는다. 아이들만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새로운 경험과 사건은 어른에게도 어렵고 힘들기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배워야 한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결국 상대방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었던 두 어른. 그들은 이별을 통해 분명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이혼이야기’가 아닌 ‘결혼이야기’이다. 우리의 인생은 아이러니로 가득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배우고 적응하고 성장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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