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상속

by 신민철

나는 그가 벌어온 시간만큼 살지 못했다. 그는 40년 넘게 일을 했고 34년을 한 직장에서 보냈다. 일이 년 만에 이직을 수차례 반복하고 있는 내게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그동안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을까. 그런 그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쓸쓸해 보였다.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으로 1년 더 남게 해 준다고 했지만, 그는 당장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처럼 허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월급이 줄었다며 멋쩍게 웃거나 퇴근 후에 방안에 누워 잘 나오지 않거나 이제 곧 백수라는 자학개그를 던지곤 했는데, 그의 아내는 그럴 때마다 다독이면서도 그의 헤픈 소비습관을 하나하나 꼬집었다. 커피나 간식값, 동호회 비용, 기타 등등. 그러면서도 남편이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닐까, 비정규직이라고 은근 무시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나는 그에게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라는 말을 선뜻 건네지 못했다. 내게는 그의 일 년 소득을 메꿀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버는 돈이 너무 적고 나가는 돈이 너무 많았다. 그런 핑계라도 대야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그냥 돈이 아까웠을 뿐이고, 그가 일하는 걸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떠나서, 그의 시간을 단 일 년도 배상할 능력이 없다니. 자식으로서 배임이라는 말을 들어도 반박할 수가 없다.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감사함보다는 부채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래야 할 거 같았다. 그러면서도 결국 고생하셨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진심을 전하는 데는 영 재주가 없는 걸 보니, 이런 부분은 그를 닮지 않았나 싶다. 만약 죄송하다고 말했다면, 그는 별 내색 없이 괜찮다는 말만 했을 사람이다. 살면서 계산 한 번 하지 않고 내게 좋은 것들만 내어주는 사람. 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배웠다.

하지만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와 별개로, 내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짐이지 않았을까 의문이 든다. 어쩌면 나는 복리로 쌓여가는 빚 같은 자식이었을지도. 덜어내고 덜어내도 줄어들지 않는 부채처럼, 나에 대한 의무가 그의 마음을 너무 무겁게 하진 않았을까 싶다. 만약 내가 그런 빚이었다면, 이제는 그에게서 그 빚을 온전히 상속받고 싶다. 다 갚지 못해서 자꾸만 쌓여가는 채무로,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아버지의 세월을 한 숟갈씩 퍼먹고 나이가 든 만큼, 내 몸 구석구석 흐르는 핏줄기에 짙은 사랑으로 남기를 바란다.

이 글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보상이 되기를 바란다. 아무런 보상도 되지 못한다면 못난 자식이 남기는 변명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이 내 곁에 없을 때, 그때 당신의 세월을 온전히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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