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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듯 당연한 무례

by 신민철

1.


열차 문이 열렸을 때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집을 잘못 찾아온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서였다. 내가 있어선 안 되는 공간에 들어온 듯했다. 나를 난처하게 한 건 너무나 편안하게 잠들어있는 한 남자였다. 그는 파우치백을 베개 삼아 좌석에 모로 누워있었는데, 시민 여섯 명의 앉을 권리를 독점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방향을 마주한 채,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고 옆으로 누워있었다. 두 발은 가지런히 모아서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자리를 잡고, 손은 파우치백 아래로 집어넣어서 베개 높이까지 적절히 맞췄다. 마치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스르르 잠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은 약간 붉었던 것 같은 인상이 남았지만, 실제로 붉었는지 술에 취한 듯한 행동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오전 10시는 이른 술자리를 갖기에도 밤새 마시고 귀가하기에도 적정한 시간대는 아니었다.


나는 그가 정말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기를 바랐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인간애를 느껴서는 아니었다. 그저 당연한 것들이 너무도 쉽게 우스워지는 게 싫었을 뿐이다. 금연구역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 밤낮없이 쿵쿵거리는 층간소음, 음식물이 담긴 채로 버려지는 재활용품 같은 거. 그런 것들이 다분히 고의적이라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서도, 확실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그가 화들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기를,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앉기 바랐다. 그러면 이 무례함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던 중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같은 칸으로 들어왔다. 그를 비웃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원치 않아도 귀로 흘러들어왔다. "이건 진짜 민폐 아니냐?" 그 말을 마음속으로 적극 공감하면서도, 나는 그가 고등학생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불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찰칵. 그때 휴대폰 촬영음이 들렸다. 뭘 찍는지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그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모를 수는 없었다.


학생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듯했다. 민폐남이라는 타이틀로 인터넷에 업로드하려는 '참교육파'와 업로드했다가는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는 '신중파'였다. 개방된 장소가 아닌 공간에서 촬영 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견했을 때의 리스크를 계산하고 있었다. 자칫 그 남자를 두둔하는 모습으로 보이진 않을까. 알량한 정의감으로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학생들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 남자를 깨우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그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2분만 더 가면 목적지인데 시비에 휘말릴 위험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얌전히 내리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며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내가 잘못 한 건 없지 않으냐고. 열차에서 내리는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뒤에서 비웃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2.


쥬라기 월드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니까 어느 정도 소음은 각오했지만, 겨울왕국 때보다 시끄러울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단 한 가족이 내는 소음이라니. 두 아이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떠들었고, 부모는 그 아이들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대화에 가세했다. 본인들만 제외하고 모두 조용한데도, 음향을 뚫고 나오는 그들의 목소리는 한 번도 낮아지지 않았다.


'내 돈 냈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듯한 태도.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유분방함. 그 낯 뜨거운 무례함은 어떤 공격성마저 느껴졌다. 본인들의 무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나오는 걸까. 이럴 바엔 집에서 OTT로 감상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생각해 보면, 이들보다 더 한 인간들은 많았다. 우리 가족이 이사 오기 전 살았던 집의 윗집. 망치 소리, 드릴 돌아가는 소리, 마늘 빻는 소리, 아이들 뛰는 소리.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 시절 고3이었던 내가 어떻게 참을 수 있었겠나. 결국 참다못해 찾아가서 양해를 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정 시끄러우면 그쪽이 이사를 가셔야죠.” 미안하다는 마음도 조용히 하겠다는 의지도 전혀 없는 사람의 태도였다.


우리는 왜 이렇게 숨 쉬듯 당연한 무례 속에서 살아갈까? 어쩌면 ‘미안하다’는 말이 사과의 표현이기 이전에, 약자의 선언처럼 여겨져서는 아닐까. 그 말을 먼저 내뱉는 순간, 잘못의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 책임이 부당하게 과장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과를 주저하고, 자꾸만 모르는 척하는 쪽을 택하는 듯하다. 타인의 불편보다 자신의 손해를 더 우선시하는 마음이 크니까.


살면서 자연스레 익힌 생존 방식이 지금의 무례함과 무관심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나는 불편하지 않으니 괜찮고, 남이 불편하든 말든 상관없는 방식.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나의 무례는 나 몰라라 잊어버리고 마는 듯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나로 인해 누군가가 불쾌하지 않기를 조심하는 마음. 그 단순한 배려 하나가 공존의 바탕이 된다. 배려는 약함이 아니다. 예의는 손해가 아니다. 그 단순한 마음 하나로 이 세상은 좀 더 따뜻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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