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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Nov 17. 2021

2년의 정산

퇴사한 직장인이 남기는 편지

다례원


산책길 단골 코스는 다례원이다기와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다례의 현판이 금방 눈에 띈다. 내부로 들어서자 색색의 꽃들이 방문자를 반긴다. 돌담을 따라 빼곡히 핀 들국화와 코스모스를 보는 게 퍽 즐겁다. 정문 맞은 편에는 현대식 한옥 한 채와 작은 연못이 있는데, 한껏 고개를 쳐든 연잎의 무리와 그 사이 샛노란 꽃술을 품은 연꽃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옆에는 작은 물레방아 하나가 부지런히 돌고, 다례원의 마당에는 줄지어 놓인 장독대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어쩐지 아늑하고, 벌써부터 그리울 것 같은 풍경이다.

최근, 출근 전 삼십분을 걷는 취미가 생겼다. 점심에는 여전히 땀 날 듯 덥지만,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니 걸을 맛이 난다. 고맙게도 회사 근처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있는 덕분이다. 회사에서 공원까지 오가는 시간을 빼면 십오분이나 될까. 걷기엔 아쉽지만,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긴다. 덥지 않을 정도의 따스한 햇살, 바람이 불 때 살갗에 닿는 찬기, 숨을 깊게 들이마실 때의 젖은 풀냄새, 노부부의 느릿한 걸음걸이. 산책길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오늘 하루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주는 듯했다. 잘 버틸 수 있다고, 지금껏 잘 버텨왔다고.


나는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재직 기간은 2년 4개월. 계획했던 시기보다 2개월 더 길어졌지만, 이제는 더 남아있을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일이 앞으로 어떠한 경력도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만 통용되는 기술이나 다른 곳에선 써먹을 수 없는 지식들. 그마저도 비전문적이라 언제든 다른 이들로 교체될 수 있는 업무들과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작업 속에서 너무나 지쳐있었다. 무슨 일이든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구닥다리 교훈을 위안 삼기에 2년은 너무 길었다.

그러나 2년은 무언가 익숙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깨어나야 하는 시간, 출근길에 보는 거리의 풍경, 모니터에 잔뜩 붙어있는 메모지와 책상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A4용지, 선물받았지만 책상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코코아가루, 친한 동료들과 밥을 먹거나 카페를 가는 시간들, 아침 식사 대신 주고받는 간식이나 습관처럼 서로에게 던지는 말들. "졸리다", "집에 가고 싶다", "힘내자" 같은...

2년 동안 익숙한 것들이 너무 많이 쌓여서 그것들로부터 떠나는 마음이 가벼울 순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이나 끝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벌써부터 티 내기 싫어서 덤덤한 척하고 싶었다. 퇴사를 앞두고 어떠냐는 말에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고 대답한 건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당장 퇴사가 두려워 남아있기에는 나이가 적지 않았다. 내년이면 서른인데 경력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이제는 내 일을 찾아야 할 때라고, 그 시기가 왔을 뿐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퇴사하기 전 지난 2년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얻은 것, 보고 배우고 느낀 것들, 낯설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것들, 내게서 점점 멀어질 것들, 곁에 있는 사람들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이나 지난 후회 같은 것들. 글 몇 자로 다 정리할 수 없겠지만, 부족하게나마 언급은 해야겠다 싶었다. 정산. 어쩌면 정산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내게 남은 것들을 헤아리는 일이니. 다만 어설픈 정산이 될 듯하다.


직장 동료가 그려준 그림들


회사에 다니면서 습관처럼 했던 말은 '버티자'였다. 오늘만 버티자. 이번 주만 버티자. 아무 효과도 없는, 형편없는 주문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회사는 때론 힘겨웠고 자주 지루했고 늘 답답했다. 업무는 반복적이고 지루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자잘한 변동사항이 잦아 스트레스가 잦았다. 나는 이런 일을 지치지 않고 반복하려면 무뎌져야 한다고, 잘 하는 것보다 잘 버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과를 내는 것보다 실책하지 않는 게, 칭찬받는 것보다 질책받지 않는 게 회사 생활의 요령이 아닐까 싶었다.

면접 때만 해도 내가 할 일은 콘텐츠 작성이라고 했다. 쓰고 싶은 대로 쓸 순 없겠지만, 글로 돈벌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입사하고 맡은 일은 차트 관리였다. 회사의 광고 순위를 기록하고, 조회수를 확인하고, 데이터베이스가 잘 넘어가고 있는지 관리하는 거였다. 왜 이런 일을 맡게 되었는지 의아했지만, 새로운 걸 배우고 익히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후 내 업무는 수차례 변경되었다. 회사의 자잘한 지출을 관리하거나, 의자나 옷걸이 같은 물품을 조립하거나, 컴퓨터를 수리하거나, 슬리퍼를 사 오거나, 택배를 보내거나, 다른 직원의 업무를 대신하는 일. 사실상 잡무나 다름없었다. 반년쯤 지나서는 이사님의 보조로 업무를 이어나갔다. 이사님이 요청할 때마다 자잘한 업무를 대신하거나 새로운 방식의 업무를 시도해보는 게 내 일이었다. 그런데 매번 업무가 바뀌고 그때마다 상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시를 잘못 이해해서 실수하진 않을까, 작업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인 건 아닐까 늘 전전긍긍했다.

회사에 다닌지 1년 쯤 지나고 나서는 사무실을 옮겼다. 광고팀으로 가고 싶다는 내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인 업무였다. 면접 때는 다양한 콘텐츠를 작성하게 될 거라 들었는데, 정작 콘텐츠는 보험에 한정되었고 그마저도 자유롭게 쓸 시간 자체가 없었다. 글자수마다 걸리는 시간을 체크했고, 하루 해야 할 분량을 지정해주었으니. 내용도 그저 공장식으로 뽑아낼 뿐이었다. 몇 가지 정보를 짜깁기하거나, 기존에 있던 원고를 일부 변경하거나, 심하면 각 문장의 어미만 바꿔서 다시 보내는 식이었으니까. 

나중에는 외부 원고를 사용하면서 글 쓸 기회조차 사라졌다. 변해가는 업무 속에서 자꾸만 지쳐갔다. 회사의 입장에선 최대한 물량을 뽑아내면서 불량은 줄이고 싶으니, 직원들에게 더 많은 양의 원고를 정확하게 작업하길 요구했다. 분량을 못 채우거나, 문구 몇 자를 잘못 쓰거나, 광고에 들어가는 사진을 잘못 넣으면 어김없이 불려가서 주의를 받았다. 불량을 용납하지 않는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앞에 서있는 듯했다. 성취물이 남지 않는 작업, 잘못한 건 눈에 띄지만 잘 한 건 보이지 않는 업무. 이런 일은 자꾸만 나를 소모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품을 덜 들이고 일하자고 생각했다. 좀 더 꼼꼼하게 할 수 있는 일을 대충 넘기거나,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시킨 대로만 작업했다. 그러다보니 확인해야 할 일을 놓치고 넘어가거나 했던 일들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나왔다. 그것도 나름대로 스트레스였지만, 고칠 생각은 않았다. 좀만 더 버티면 퇴근하니까. 머릿속에서 일을 지워버릴 수 있으니까. 퇴사가 가까워질수록 그런 생각이 더했다. 열심히 해도 티나지 않는다면 티나지 않게 건성으로 하겠다. 그런 심보였다.




회사에 다니면서, 늘 의미있는 일과 돈벌이 사이에서 갈등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글로 벌어먹기엔 글렀다고 늘 생각했다. 기성작가의 문장은 아득히 멀리 있고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으며, 작가의 삶이 팍팍하다는 것도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음에도 글쓰기를 포기할 순 없었다. 쓰면 쓸수록 부족하다는 걸 여실히 알게 되면서도, 스스로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쓰고 싶었다. 흔한 자격지심이다. 그게 길어졌다. 꽉 붙들고 매진하지도, 아예 놓아버리지도 못한 채로...

회사에 다니면서 지지부진하게 글쓰기를 이어갔다. 블로그에 에세이를 업로드하고, 글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해 소설을 쓰고, 브런치에 글 몇 편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글쓰기 어렵다는 걸 다시 느꼈고, 몇번이고 좌절했다. 글을 쓰려면 보통 부지런해서는 안되구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야 하는구나. 그런 반성과 다짐을 수차례 하면서도, 오랜 시간 들여 몇 문장 쓰고 나면 회의감이 몰려왔다. 이럴 시간에 자격증 하나 더 따거나, 영단어 몇 개를 외우는 게 더 도움되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나아가는데 나만 뒤처지고 길 잃는 것 같았다.

쓰는 동안에도 불안했지만 쓰지 않을 때도 불안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쓰지 않을 때는 이러다 영영 글을 쓰지 않을까봐, 꿈으로부터 점점 멀어질까봐 두려웠다. 잘 하는 일 없이, 하고 싶은 일도 없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나이 들기 싫었다. 그래서 벗어나지 못했고, 얼마 못 가 다시 쓰고 있었다. 글에 단단히 매인 것만 같다.




어느 날은 버스를 잘못 탄 적이 있었다. 34번 버스를 4번으로 잘못 본 탓이었다. 그걸 10분 넘게 가서야 알았다. 그때가 8시. 출근 까지 30분 남은 시간이었다. 배차시간을 따져보니 되돌아갈 순 없었다. 가까운 역을 검색하고 낯선 공업 단지를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맞는 방향인지도 모르고 일단 달렸다. 헉헉댈 정도로 숨이 차오르고 옷이 땀으로 젖어들었다. 이렇게 뛰는 게 얼마만인지. 몇 분 뛰지도 않았는데 발목이 시큰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역에 도착했을 땐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애초에 뛴다고 해결될 거리는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인사를 먼저 해야하나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잔뜩 걱정했는데 예상외로 회사에선 별 말 없었다. 도착해서 보고하라는 게 끝이었다. 전화 한 통이면 될 걸. 고작 몇 십분 늦는 것 가지고 이렇게 필사적으로 뛸 필요 있었나. 그냥 택시를 탈 껄. 이런 날 연차 한번 못 쓰나. 자잘한 후회와 불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살다보면 딱히 이유가 없이 다 내려놓고 싶은 날이 있다. 내겐 그 날이 그랬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었다. 출근하기엔 날씨가 너무 맑고 바람이 시원해서 벤치에 그대로 누워 한 숨 자고 싶을 지경이었다. 회사고 뭐고 아무래도 좋을 것만 같았다. 땀으로 옷이 젖어 살짝 서늘하긴 했지만, 차양막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볕이 따스했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된 걸까. 원치도 않는 일을. 눈을 감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내일채움공제를 받으려고 아득바득 2년을 버티는 게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가. 이력서에 한 줄 쓰기도 애매한 일을, 비전도 없는 일을 이어가는 게 맞나? 방향도 모르고 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미 알고 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돈은 아니라는 거. 그런데 이 회사에서 1년을 버틴 이유는 그 돈 때문 아니었나? 2년도 못 채우고 나오면 1년 동안 버틴 게 아깝지는 않나.

뒤늦은 출근길, 곤란한 질문을 자꾸만 던졌다. 퇴사하고 나면 뭘 할건지. 하던 일을 대뜸 팽개칠 만큼 간절한 일이 있기는 한 건지. 아무 준비 안 되어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꾸만 되물었다. 알고 던지는 질문은 추궁이나 다름없다. 왜 이렇게 대책없이 사냐는 추궁. 어쩌면 어떻게 살거냐는 집요한 물음으로부터 지금까지 도망쳐 온 걸지도 모르겠다.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불안에 몸을 싣는 것. 그게 세상살이의 법칙이고 어른의 삶이고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겠지만,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동네 풍경


지난 2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 삶의 몇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간추려 본다면 3가지쯤 된다. 첫번째는 이사다. 이사라고 해봤자 살던 곳에서 10분 남짓한 거리지만, 우리 가족에겐 의미가 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이십대 후반까지, 20년 넘게 지낸 곳이니 이런 변화가 낯설고 새로울 수밖에. 그동안 이사하지 못한 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아버지는 30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할만큼 성실했지만, 집을 담보로 주식 투자할 만큼 무모한 사람이기도 했다. 무리한 투자로 많은 돈을 잃었고 우리 가족은 불화를 겪었다. 이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뺀 가족들은 외가에서 자는 날이 늘었고, 나는 자는척하며 할머니와 어머니의 대화를 숨죽여듣곤 했다. 주식과 돈과 빚, 그 단어들이 주는 압박감, 가슴 답답한 정적, 습도 높은 목소리, 베개에 얼굴 묻고 눈물 숨긴 시간들. 나는 종종 밤중에 정처없이 걷는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아버지는 성실하게 일을 나갔고 어머니는 빚을 갚기 위해 공장을 전전했다. 집안 사정이 나아지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년 가까이 한 집에서 산 건 이런 이유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이사를 결심한 건 새식구가 늘어서였다. 예비군을 다녀온 날이었다. 집에 와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짧은 다리로 온집안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갈색 푸들. 사료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작은 털뭉치. 누나가 초코를 데려 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초코의 원래 이름은 모카였다. 발음이 어렵다며 바꾼 게 초코. 안 그래도 좁은 집에 개를 데려오면 어떡하냐고 타박하던 부모님은, 이제 초코도 한 가족이라며 어딜 가더라도 함께 하신다. 실내 배변을 하지 않는 초코를 위해 하루에도 서너번씩 산책을 나가고, 사료에 간식을 섞어 끼니 챙기는 걸 보니 영락없는 부모의 모습이다. 이 식탐 많은 말썽쟁이한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안을 받았는지.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서면 조그만 몸으로 부리나케 달려와 맞이한다. 꼬리를 연신 흔들어대는 걸 보니 내가 그렇게나 반가운 모양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대가없이,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게 쉽지 않을텐데 초코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초코 때문에 이사해야겠다. 어머니는 그 말을 몇 달 동안 가족들에게 은근히 흘렸다. 집도 좁은데 개 한마리가 난리를 치고 다니니 정신 없다는 게 그 이유. 한 집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동안 쌓인 살림과 잡동사니를 감당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이사를 반대하던 아버지도 몇 달간의 끈질긴 공세에 두손을 들었다. 어머니는 허가가 떨어지길 바라며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까지 이사에 동의하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우리 가족은 한동안 퇴근하고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 눈여겨 본 게 지금 사는 지금 사는 집이다.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부는 곳, 거실에서 보는 풍경이 아파트로 가려지지 않은 곳, 더이상 부엌에 갈 때마다 좁다고 불평하지 않아도 되는 곳, 초코가 좀 더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는 곳, 더이상 어머니가 답답하지 않아도 되는 곳. 사람 사는 곳이니 약간의 아쉬움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우리 가족의 마음에 들었다. 다만 문제는 다른 집보다 값이 더 비싸다는 거였다. 같은 동네의 아파트니 나는 른 곳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그 집이 아니면 이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집 보고 온 날 우리 가족은 외식을 했다. 주문을 하고 잠시 기다리자 광어와 우럭 회가 보기 좋게 차려졌다. 평소에 가격 얘기부터 꺼내던 어머니가 그날만큼은 먹고 싶은 거 다 시키라고 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큰돈 앞에서 작은 돈이 우스워서도 아니었고 이사 기념도 아니었다. 그날의 회는 이사 대신이었다. 예산에 비해 집값이 너무 비쌌고, 무리를 하기에는 아버지의 정년이 가까웠고, 그렇다고 눈높이를 낮춰 다른 집을 찾아보고 싶진 않았다. 대출을 끼고 누나와 내가 달에 얼마씩을 내면 되지 않겠느냐. 그 제의를 부모님은 단번에 거절했다. "버릴 거 버리고 잘 정리하면 지금 집도 살만하다. 집 가서 안 입는 옷부터 버리자." 어머니는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는 다들 음식에 정신 팔려 다른 생각 못 하는 사람처럼, 눈치라곤 전혀 없는 사람처럼 회를 집어먹고 맛을 칭찬했다.

이사갈 줄은 몰랐다. 그날만 해도 안 입는 옷을 버리고 화분을 치우고 잡동사니를 버리고, 이사갈 필요 없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이사 가서 돈 걱정하는 것보다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는 게 낫다고. 이사 가면 출근하기 불편할 거라고. 한 집에서 오래 살아서 다른 데는 적응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가 이사가자고 했다. 모아둔 돈이 있었다면서. 필요할 때 쓰려고 남겨뒀는데 이 돈을 쓰면 너희에게 남겨줄 돈도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사를 갔다.

어머니가 참 좋아했다. 갱년기가 오고 나서 답답하다는 말을 달고 살더니, 이사오고 나서는 베란다만 보면 시원하다고 감탄을 한다. 이전 집에서는 거실 베란다를 내다보면 맞은편 아파트가 시야를 가로막았고, 반대편 창문을 내다보면 묘가 보였다. 내방 뒤쪽으로 작은 산이 있었는데, 한 면을 평평하게 밀어 묏자리를 만든 거였다. 고인에 대한 존중을 떠나 주민 입장에선 보기 흉한 모습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사 오고 나선 하늘만 보였다. 베란다 앞에 서서 지상을 내다보지 않는 이상 새파란 하늘만 보였다. 어머니가 이 집을 선택한 이유도 베란다 밖 풍경에 있었다. 이사는 더이상 칙칙한 풍경이 아니라 맑은 하늘을 보고 싶다는, 이제부터는 우리 가족 다들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한 가지 변화는 운전이다. 아버지가 차를 바꾸면서 이전에 타던 산타페를 물려받게 된 것. 13년도에 운전 면허를 따고 8년만에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자석에 앉을 때부터 왜 이렇게 겁이 나던지. 잠깐 정신을 팔면 삐뚤빼뚤, 차선 맞춰 주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차선을 바꿀 때도 꽤나 애를 먹었다. 수줍은 남학생처럼 쭈뼛쭈뼛, 끼어들 타이밍을 못 잡아 망설였으니까. 주차는 또 얼마나 어렵던지. 후진할 때면 잔뜩 술 취한 사람처럼 좌우를 헷갈리기 일쑤였다. 운전하는 게 두렵고 막막했다. 매번 잔뜩 긴장한 상태로 차를 몰다보니 즐거울 리가 있나. 그래도 뭐든 하다보면 익숙해지듯이 운전 실력도 자연스레 늘었다. 차선 변경도 곧 잘 하고, 약간 어설프지만 주차도 웬만큼 한다. 다만 여전히 두렵긴 하다. 차를 몰다보면 위험한 상황이 나오기 마련이고 언젠가 사고도 겪을 수 있으니까. 더 능숙해지더라도 약간의 긴장감은 늘 부적처럼 지녀야겠다 싶었다.




퇴사 하기 전부터 조금씩 쓴 글이었는데 퇴사하고 한 달 더 넘어서 글을 올렸다. 퇴사하고 나서 어떻게 지내야겠다는 나름의 계획이 있긴 했는데 쉬다보니 더 게을렀나보다. 아는 사람들이 본다는 생각에 괜히 민망해서 자꾸만 글을 지우고 고친 것도 늦게 올린 한 가지 이유긴 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써서 올리는 건 함께 지내온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좀 더 진솔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지루하고 고된 회사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했던 2년은, 늘 좋았던 건 아니지만 같이 해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기분 좋은 자잘한 추억들을 쌓을 수 있어 감사했다. 같이 해서 재미있었고 때론 위로를 받았고 어떨 땐 힘이 되기도 했다. 내 편이 있다는 생각에 든든했고 때론 투정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기분 나쁜 일 있을 때마다 내 편 들어 화내주는 동료가 있다는 게, 심심할 때마다 말 받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괜히 우울한 날 내 기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함께 회사를 다닐 때만큼은 자주 만날 순 없겠지만, 그때 그 고마운 마음은 오래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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