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전화 번호를 변경했다.번호를 바꾼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두 번째는 전역 후, 그다음은 지금.
나는 그때마다 극단적으로 관계를 단절해왔다. 일부만 제외하고 연락처를 대부분 지웠다. 연락이 닿아 다시 저장한 번호들도 지금은 없다. 한번 끊어낸 관계는 결국 끊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아쉽지 않냐고. 어떻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관계를 잘라낼 수 있냐고. 누군가 나무라듯 물었다. 대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아 말을 삼켰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실은 나도 네 말이 맞다고 속으로 동의했다.아쉬움은 어떻게든 남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관계가 언젠가는,어떤 형태로든 끝이 날 거라 예감했다. 혹은 이미 끝났다고 판단했다. 끝난 관계에서 애쓸 필요 없다고 단정했다.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고 오히려 지워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나는 이미 끝을 상정해놓고 관계를 이어가는 건 아닐까 스스로 의심했다.
이미 끝났거나 끝나가는 관계들을 정리한 것뿐이라고, 네게 그런 식의 변명을 늘어놓은 기억이 났다. 남겨지는 것보단 늘 미련 없이 떠나는 쪽이낫지 않을까. 나는 이런 문제에선 한없이 이기적인 사람이다. 아쉬운 티 내는 건 자존심 상하고, 불편한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싫다. 마음 준 상대에게 상처받는 것도 두렵다. 내 마음 편한 대로 사람들을 밀어내고, 자꾸만 선을 긋고, 이기적으로 구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원래 네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였다.
결국 이런 말을 하는 건, 나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끈질긴 사람들에게 구원받아왔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간헐적인 우울에서 건져져 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묵묵히 지탱해주시는 부모님,5년 넘게 나의 일상이 되어준 여자 친구와 손에 꼽을 만큼 먼저 연락 않는 나를 오래 견뎌온 친구들, 자꾸만 나를 우울에서 끄집어내서 일어서게 해주는 사람.나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기에, 다 갚기 전엔 그들만큼은 도저히 끊어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빚은 평생 다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자꾸만 불어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