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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Jul 07. 2022

말하는 대로 살게 될 것이며

생산직과 사무직에 대한 고민


아는  소개로 공장에 이력서를 냈다. 가깝고 페이가 괜찮았다. 한 주씩 주야로 돌아가는 52시간 근무. 쉽지 않을 듯했지만, 그 정도는 참고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락이 와서 면접을 봤고 그 주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이상이 없다면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건강검진을 받고 와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다른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유튜브 채널의 대본작가.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글 쓰는 일이라서 흔들렸다. 글 쓰는 일이 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헤맸던 거니까. 다만, 면접을 보더라도 합격할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공장을 다니면 돈벌이는 확실했다. 전문직이나 대기업보다 연봉이 높을 수는 없겠지만, 경력 없는 일반 사무직으로는 벌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그런데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려면, 일정상 공장에 출근할 수가 없었다. 떨어질지도 모르는 데, 다른 선택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리스크를 껴안는 셈이었다.


리스크. 최종 결정을 내린 데는 보상보다 리스크가 크게 작용했다. 근무기간을 2-3년으로 상정하여, 내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들을 계산해봤다. 공장에 다니면 종잣돈을 모을 수가 있지만, 근무시간이 길고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해야 했다. 또한 이 회사를 그만둔다면 다시 헤매게 되거나 다른 공장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는 걸 짐작했다. 그때는 서른둘 혹은 서른셋의 나이로.


보조작가로 일한다면 내가 원하는 수준의 페이를 보장받지 못한다. 연봉 인상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이 회사에서 경험을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거란 느낌은 있었다. 2,3년 뒤에는 가야 할 길이 좀 더 명확해질 거란 , 이 일이 내 선택의 폭을 좀 더 넓혀줄 거란 기대 같은 것들.


일요일 저녁이 돼서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공장을 소개해 준 분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고, 그분은 아쉬워하면서도 내 선택을 존중해줬다. 결국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보조작가로 면접을 보기로 한 것이다. 회사에는 직접 찾아가 얘기를 전했다. 그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다른 기회가 생겨서 다닐 수 없게 됐다는 말. 그 말을 꺼내자니 왠지 모르게 낯부끄럽고 면목이 없어서 입이 잘 트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월요일이 돼서야 방향을 틀은 건 앞서 말했듯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때 그 시간만큼은 이런저런 구실을 덧붙여 힘든 일에서 도망치는 기분이었으니까.


다행히 락의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날 그 얘기를 들은 친구가 아침부터 기프티콘을 보내주었고, 그 선물에 고맙단 얘기를 전하려고 몇 마디 대화를 이어갔고, 그러다 보니 허무하게도 자연스레 괜찮아졌다. 간단한 안부에도 금방 시시해고민거리들. 언젠가 나도 이 친구한테 같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다. "거봐, 별 거 아니지"하고.



면접은 수요일 오후 4시에 봤는데, 5분 전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한 곳부터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고, 위치를 착각하는 탓에 시간이 꽤 지체됐다. 덕분에 긴장할 틈도 없이 바로 면접에 들어가야 했다. 3:1 면접이었다. 다대다 면접이 아니라 내심 안도했다. 면접자가 여럿이면 자꾸만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애초에 다대다 면접이 그걸 의도한 방식이겠지만.


몇 가지 질문이 기억난다. 떠올려봤을 때 만족스럽게 대답한 것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 


1. 5년 후 어떤 모습이 되고 싶냐는 질문

2. '회사는 교육 기관이 아닌데, 대체 뭘 배우고 싶다는 건지'라는 질문.

3. 글을 쓰는 목적이 뭐냐는 질문.


첫 번째 질문에는 친구와 대화를 떠올렸다. 나까지 셋. 모두 오랜만에 만나는 사이여서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일 하는지 묻곤 했다. 둘은 비슷한 기계를 다루다 보니 통하는 얘기가 많았지만, 나는 내 일에 대해 설명하기 좀 민망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경력으로 치기엔 애매한 일. 그때 내 일에 대한 인식은 딱 그 정도였다. 나는 완전히 관전자 입장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어야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대답은 '다른 사람한테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해 온 일은 이런 것들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작업물을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 내 콘텐츠와 내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였다. 면접 때보다 살은 좀 붙였지만, 이런 식의 대답이었다.


두 번째 질문은 내 생각에도 시원찮게 대답한 듯했다. 여기에선 반박할 수 있어야 했다. 접관의 의도에 맞든 맞지 않든. 회사는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말은 맞다. 그 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회사는 이익집단이다. 지만 그 시간 일하면서 배울 게 없다는 건 이상하다. 다못해 단순 반복 업무도 나름의 배울 것들이 있다. 내 경우에는 유튜브 대본작가로 일하다 보면, 콘텐츠를 기획하거나 제작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내가 쓴 대본으로 나중에는 나만의 콘텐츠를 기획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여하튼 내 생각은 배움은 교육기관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뭐든 배우고 그것들을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게 내 생각이다.


세 번째, 글을 쓰는 목적이 뭐냐는 질문에 글로 수익을 내는 거라고 답했는데, 대답을 너무 성의 없이 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수익과 연결시키고 싶다. 돈이 열정을 견인해가고, 열정이 돈을 끌어모을 수 있게 만들고 싶다. 이제 그냥 쓰기에는 사회의 물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일까... '불도 장작이 있어야 탄다'는 게 이젠 속물이 되어버린 나의 생각이다.


아직 면접 결과는 나오지 않았는데, 이곳에 붙든 떨어지든 내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게 어떤 종류든 무슨 방식이든. 이제부턴 그것들을 하나하나 쌓아갈 생각이다. 지금까진 일기 대신 써왔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모여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하나의 증명이자 예고가 되어줬으면 한다. 나는 내가 말하는 대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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