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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Jun 22. 2022

5년 전에 쓴 글을 읽었다


뭐든 꾸준히 하는 게 쉽지 않다. 문제는 그 일을 아예 그만두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거다. 지부진한 꿈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 하긴 했지만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어떠한 결과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태. 애매한 재능과 애매한 결핍과 애매한 끈기로 만들어진 꿈은 때론 달콤하고도 때론 쓰다. 어쩌면 런 상태를 지속하는 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좌절의 늪에 빠지기 싫어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닐까. 내겐 글쓰기가 그렇다. 쓰면 쓸수록 어렵고, 자꾸만 길을 잃고, 내 글이 어디쯤 왔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런 생각이 들 때면 5년 전에 들었던 말 한마디가 떠오르곤 한다.


"이 정도로 써도 어렵다. 그걸 몸소 보여주니 얼마나 좋은 선생이냐."


내가 다녔던 대학의 교수님은 방학 때마다 책 한 보따리를 들고 절에 들어간다고 했다. 일 읽고 매일 쓰고. 그야말로 정진(精進)이다. 등단한 지 30년이나 되는 분이 이렇게나 곧게 나아갈 수 있다니. 열정을 불로 비유한다면 이미 다 타서 재만 남았어야 할 분이 저렇게 빛을 밝히고 있다니, 내 안에서는 불쑥 경외심마저 들곤 한다. 존경스럽고, 또 두렵다.

 



내가 글쓰기를 처음 접한 건 14살이었다. 한창 사교육 열풍으로 학원들이 우후죽순 들어설 때였다. (내가 다니던 학원 원장님) 들어올 때 열심히 노를 저었다. 미술반, 컴퓨터반, 속독반, 논술반. 강의실에 컴퓨터를 들여놓고, 빔프로젝트를 설치하고, 개강과 폐강을 반복했다.


글쓰기의 시작은 논술이었다. 되돌아보자면 논술 선생님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잘 쓴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열심히 쓰다가도, 어느 날은 못 쓰겠다며 투정도 부렸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나를 더 신경 써달라는 행패쯤이 아니었을까. 그때마다 선생님은 그런 날도 있다고, 군것질 하라며 돈을 쥐어줬다. 종이컵에 담긴 떡볶이.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떡볶이가 그땐 그렇게도 맛있었다. 한 컵에 7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선생님은 대여섯명 되는 학생들의 간식비를 매번 선뜻 내놓으셨다. 얼마 안 되는 돈이긴 했어도, 언제 잘릴 지 모르는 시간제 학원강사가 돈 벌러 와서 돈을 쓰고 있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논술 선생님은 1년 정도 지나서 학원을 옮기셨다. 그도 그럴 게 수강생이 너무 적었다. 선생님의 월급과 학생들의 수강료, 기회비용 등을 따져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나는 어쩌면 이때부터 글 쓰는 삶의 팍팍함을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이후에는 문예창작학과 진학했다.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습작도 안 되어있는 상태였다. 문창과를 선택한 데는 오직 논술을 배웠던 기억과 글쓰기의 즐거움 때문이었다하지만 논술과 문학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소에 책 한 권 읽지를 않았으니, 기본기도 없었고 감도 없는 게 당연했다. "이건 소설이 아니다. 기본 문장도 안 됐다." 그 얘기를 교수님께 참 많이도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깔아뭉개질 때마다 다음번에는 더 잘 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수치심도 들었지만, 투쟁심이 더 컸고 어떻게든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아버지가 손을 펼친다. 왼손에는 반쯤 잘려나간 약지가 보인다. 실밥이 남은 자리에는 다른 손가락이 그러하듯 굳은살이 박여 있다. 손끝이 돼버린 손마디에는 삼십 년 넘게 쇠를 두드려온 사람의 우직함과 은근한 자부심이 서려있다. 그것은 일종의 훈장이자 고생의 흔적이고 책 대신 망치를 들어야 했던 다섯째 아들의 설움일지도 모른다. 내게 아버지는 밥 대신 개수대의 물을 마셔야 했던 가난한 국민학생도, 망치를 두드리는 남자도 아닌, 뭉뚝한 약지를 지닌 남자다.

아버지는 내 시선을 의식해 오른손으로 핸들을 바꿔 잡는다. 나는 아버지의 약지에서 연필을 떠올린다. 닳아서 작고 뭉뚝해진 연필. 아버지의 약지는 어쩌면 한순간 잘려나간 게 아니라, 수십 년을 거쳐 작고 뭉뚝하게 닳아 없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5년 전에 쓴 졸업 작품을 읽었다. 위의 글은 드라이브를 하면서 아버지 반쯤 잘려나간 약지에 대해 묻는 장면다. 아버지는 호랑이에게 약지를 물려갔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고, 아들은 그 말에서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엿본다는 게 이 소설의 주제였다. 초보 습작생이 그렇듯 전체적으로 투박한 문장에 주관적인 표현이 가득하고, 문장을 꾸며내느라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다만,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부족하긴 하지만 잘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고, 헤매긴 하지만 언젠가 길을 찾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은 헤매다가 멈춰 선 기분이다.

다시 나아갈 수 있을까. 즘은 그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서인지 발전보다 기록에 더 초점을 두고 산다. 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자주 메모한다. 더 나아지진 못해도 어떻게 살아는지 증명은 하고 싶어서... 그래서 오늘도 나는 지지부진한 글쓰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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