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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Jun 17. 2022

외할아버지는 뱃사람이셨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외할아버지는 뱃사람이다고 한다. 돌아가신 지 십년은 돼서야 아버지께 그 얘기를 들었다. 고인의 얼굴도 잘 기억 안 날 만큼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뱃사람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내게 외할아버지는 오래돼 버려진 장롱 같은 사람이었다. 한없이 쓸쓸한 사람, 말이 없는 사람, 쓸모를 다 한 것만 같은 사람.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어디선가 웅숭그리고 앉아 담배를 물거나, 안주도 없이 강소주를 들이켜는 모습만이  남아있다. 항상 있는 것처럼 없 없는 것처럼 있는 사람. 할아버지는 집 앞 흙길에 앉아계시거나 골목의 돌담에 기대어 서서, 우리 가족이 인사를 하면 '끄덕'하고 받아주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집 밖으로 자주 나도셨지만, 일정 반경을 넘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게 우리를 반기려고 나오신 거란 걸 알기에는, 그 시절 내가 너무 어렸다.


어릴 적의 는 그 모습이 싫기만 했다. 그 지긋지긋한 여유로움과 대낮부터 술에 찌들어있는 그의 수십 년 습관, 퀭한 눈 속에 담긴 무기력함이. 


폐지를  리어카에 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더욱 미웠다. 할머니는 허리를 별로 굽히지 않아도 폐지를 주 수 있었다. 등이 심하게 굽어 땅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할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셨다. 길가에 보이는 폐지들을 리어카로 싣고 와서, 노란색 줄로 그것들을 묶어 집 앞에 차곡차곡 쌓아두셨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평생을 부지런하셨다. 생활비 하시라고 드린 용돈을 꽁꽁 숨겨두고, 폐지나 고철을 주 지폐 몇 장과 바꾸는 일과에 기쁨을 느끼시는 분이었다. 엄마, 아빠, 이모나 삼촌들이 말려도 그만 두시 지를 않았다. 가시넝쿨 같은 고생이 한평생 덕지덕지 엉겨 붙어 떼어낼 수가 없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나는 할아버지를 자꾸만 피하고 있었다. 밉고 답답한 데, 피하는 것 외에는 그 감정을 내비칠 방법이 없었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할아버지도, 우리가 찾아오는 날에는 유독 집안으로 들어오시지를 않았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는 걸, 몇 년 전에서야 알게 됐다.


외할아버지께서 뱃사람이셨단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잊고 살았던 고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 '손주', '손자', 아니면 내 이름 석자. 고인의 음성으로 불려진, 나의 명칭이 단 한 가지도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그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외할아버지를 몇 번이나 불러봤을까. 내 기억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가 다였고, 그것도 나중에는 "안녕하세요"로 변경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철저히 외로움 속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고인을 더 외롭게 만든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가족들을 두고 인천으로 올라온 그가, 나이 들어 평생의 천직을 잃었을 때 느꼈을 허탈함과 두려움내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할아버지는 어쩌면 돌아가실 때까지, 술과 담배에 의존해서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던 게 아닐까. 오늘만큼은 외로웠을 그를 위해 등대의 불빛이라도 되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살가죽이 햇볕에 그을리고, 차디찬 바닷바람 때문에 살갗이 거친 사내들. 그들은 동이 트기 전부터 숙취로 무겁게 젖은 몸을 으킨다. 고된 뱃일로 다진 근육과 억센 팔로 그물을 걷어올리며, 정신 못 차린 신입들에게 욕지거리를 한바탕 쏟아붓는다. 공격적인 입담과 수위 높은 농담들. 들에게는 인사치레만큼이나 흔한 말들이다.


"곧 육지다."


그 말과 함께 몇 명의 사내들이 몰려든다. 그들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바다 위에서 오래 먹고산 사람만이 갖는 투쟁심이나 내면의 단단함이 보인다. 그 사이를 중년의 남자 하나가 밀치고 들어온다. 사나운 그들마저도 그 앞에서 존중의 표시를 다한다. 그의 표정에는 무언가 슬픈 기운이 감도는 것 같고, 드디어 긴 항해를 마무리한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새 수평선으로 태양이 잠기기 시작한다. 붉은 기운이 온 바다를 물들이고, 남자의 눈에는 바다의 짠기가 감돈다. 이 항해는 남자에게 마지막이 될 테였다. 남자는 이제 배에서 내리게 되었다. 곧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진출처: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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