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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Aug 14. 2022

글쓰기를 생각하면 신발장이 떠오르곤 한다

그 헬스장은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데, 헬스클럽보단 헬스이라는 어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은 곳이었다. 낡고 녹이 슨 운동기구,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물만 나오는 샤워장, 기구마다 하나씩 올려져 있는 땀에 젖은 수건, 90년대에나 들었을 법한 노랫소리를 뚫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기합소리.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헬스장 입구에 자리한 신발장과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찬 신발들이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몸뚱이에 끼여있거나, 어떻게 올려놨는지 사다리 없이는 꺼내지 못할 만큼 높이 올려져 있거나, 불법 주차된 차처럼 계단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회원이 그리 많지 않았던 곳이라서 사람마다 발이 3쌍씩 달린 게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버려진 신발은 한 달 내에 처분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신발이 버려진 것인지, 이 많은 신발은 어떻게 정리할지, 뒤늦게 신발을 찾으러 온 회원의 컴플레인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관장 입장에서도 방치하는 편이 골치가 덜 아프겠다 싶었다. 그 신발장은 그야말로 신발들의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글쓰기를 생각하면 그곳의 신발장이 떠오르곤 한다. 그건 신발장의 신발들 중 하나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회원권을 끊고 한 주를 열심히 다니다 보면, 그다음 주는 약속이 생기거나 가기 싫다는 핑계로 며칠을 빠진다. 그게 반복되면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많아지고 최종적으로 신발을 찾아가기도 귀찮아지는 상태가 된다. 같은 이유로 내 신발도, 그곳 한 구석에 가지런히 안치되었다.

결국 찾아가지 않았고, 한참이 지나 다시 왔을 때는 신발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헬스장 이용권을 새로 끊었고, 누군가의 신발이 있다가 사라졌을 자리에 새로운 운동화를 가져다 놓았다. 내 신발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걸 분실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처리되었다고 봐야 하나, 내가 버렸다고 할 수가 있나, 그것도 아니면 대체되었다고 하는 게 맞나.

사람들이 신발을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대개 귀찮아서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다시 운동을 하러 갈 거라는 기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신발장을 마음대로 작명하자면, '희망 찬 신발들의 무덤'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 신발장에 대해 파고들다 보면, 나는 어느새 글쓰기를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회수해야 할 신발을 아직도 못 찾아온 게 아닐까. 글쓰기를 그만 둘 때를 놓쳐서 아직도 지지부진한 행위를 그만두지 못하는 게 아닐까. 써야겠다고 다짐만 하고 정작 쓰지 못하는, 아니 쓰지 않는 상태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지 못하겠다.


글로써 먹고살아야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논술을 배웠고, 문예창작학과로 진학을 했다. 4년간 글을 배우면서 나도 언젠가는 등단을 하고 책도 내고 동경하던 작가들처럼 살게 될 거라 믿었다. 조금만 더 쓰면 가능성이 열릴 거라고 자신했던 적도 있었다. 글만 잘 쓰면 될 줄 알았다. 책을 더 읽고 좀 더 열심히 쓰고. 그게  내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론일 줄 알았다. 4년간 글을 배우면서 현실감각이 둔해진 탓이었다.

졸업할 때가 돼서야 뒤늦게 취업 자리를 알아봤지만, 내게 맞는 일이라곤 단 한 가지도 없는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글쓰기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출판 편집자가 되기 위해 인천 집에서 서울과 파주를 오가며 출판사와 출판 학교의 문을 부단히 두드렸다.

정작 들어간 곳은 글과는 동떨어진 보험 광고 회사였는데, 그곳에 다니며 편집자가 되지 못한 한을 블로그에 풀어내곤 했다. 글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있는 것보다 편집자가 되지 못한 게 더 분하다니.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헬스장을 자주 끊고 금방 기부천사가 되어 떠나는 내게, "너 헬스 시작한 지 얼마나 됐지?"라며 친구들이 종종 묻곤 한다. 궁금해서가 아니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표정으로. 그러면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제 3개월 정도 됐다며 뻔뻔하게 받아친다.

하지만 글쓰기는 다르다. 종종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글을 얼마나 써왔냐고 물어올까 봐 두려워지곤 한다. 그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남들의 기대치와 그동안 써 온 것들에 대한 결괏값의 편차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만약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시간을 밝혀야 한다면, 1년 정도는 언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마저도 자신이 없다. 나는 아직 글쓰기라는 신발 한 켤레를 신발장에 고이 간직해놓고 가끔 꺼내어 신고 있다. 낡고 정이 든 신발 한 켤레. 버릴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고, 잃어버릴 수도 없고, 처리되지도 않는,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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