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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May 31. 2023

해변의 안갯속에서 둘이

1.


간밤에 침대에서 떨어졌고, 광대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침대 옆 선반에 얼굴을 부딪힌 걸로 짐작됐다. 내겐 사실 웃긴 해프닝(다소 고통을 수반한)이나 다름없었지만, N은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굴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면 다행이지.


괜찮다고 몇 번을 답했음에도 N은 로비에서 얼음을 챙겨 왔고, 지퍼락과 얇은 셔츠로 솜씨 좋게 얼음주머니를 만들어왔다. 나는 얼굴에 닿는 냉기가 아릴 정도로 차가우면서도, N의 손길이 너무도 따스하게 느껴져서 왠 더 엄살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바보야. 왜 떨어지고 그래.


'떨어질 수도 있지'라며 장난스레 넘어가 싶었지만, N이 울고 있었으므로 장난칠 상황이 아니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 순간에는 괜찮다 말 밖에는 건넬 말이 없었는데, 괜찮다고 말하는 그 순간 느껴지는 통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대신 마음속 깊은 곳의 해묵은 상처나 걱정까지도 괜찮아지는 것만 같았다. 가 누구를 위로하는 걸까. 날 이렇게 아끼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듬뿍 위로를 받은 듯했다.


 

2.


우리는 양양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N이 휴직을 하면서 오랜만에 생긴 여유였다. 몇 년간 쉬지 않고 일한 N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쉬면서 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이미 많이 쉬어본 사람의 입장에서 N이 조금이라도 걱정 없이 편히 쉬었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온갖 걱정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고 바쁘게 끝내야 할 몇 가지 업무나 자잘한 계획 또는 매번 지키지 못할 다짐들. '이렇게 살아선 안 되는데'나 '남들만큼은 벌어둬야 하는데'같은 생각들, 정을 부르는 걱정들.


그런 걱정에 빠져서, 여행 끝나고 다른 일정이 있냐고 묻는 N에게 "여행 끝나면 그냥 일상을 잘 살아야지"라며 다소 생뚱맞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행복한 순간에 불행을 떠올리는 사람, 하나라도 더 채워가야 하는 순간에 내게 부족한 것부터 셈하는 사람, 그래서 온갖 걱정이 가득하면서도 다른 말로 둘러대고 회피하는 사람, 네 앞에서 자꾸 못나지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너의 괜찮냐는 말에 울컥했고, 별거 아닌 아픔에도 엄살을 부리고 싶어 졌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3.


맥주 몇 잔에 취기가 오른 채로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으며 기분 좋게 비틀거렸다. 머리칼을 젖게 만드는 차가운 습기나 신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모래알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를 서로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고, 규칙하게 몰아치는 파도소리를 들<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이 서래에게 했던 대사를 따라 했다.


" 폰은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N의 그럴듯한 성대모사에, 나는 서래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로 응수하며 킬킬거렸다. 불현듯 그 영화가 떠올랐던 건 안개와 바다가 주는 이미지 때문었을까. 안개가 주는 불확실성과 불명확함,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파도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까지도 너무나 잘 담아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한 짧은 품평을 마치고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걸었고, 형광색 옷을 입은 낚시꾼을 지나쳤고, 무지개색으로 변하는 조명에서 노란빛을 찾았고(조명이 옥수수처럼 생겨서 노란빛으로 바뀌는 순간 "옥수수다"를 외쳤다), 물가에 앉아 눈을 감고 파도소리를 들었다.


쏴아ㅡ 쏴아아ㅡ


잠이 오지 않는 밤 듣고 싶을 만큼 안정감을 주는 소리였다.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낮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소리,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가볍게 느껴질 만큼 무거운 밀도를 가진 소리,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며 가볍게 부서져버리는 청량감을 지닌 소리.


N과 함께 파도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동안 괜찮지 않았던 모든 걱정들이 모조리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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