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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형 Oct 07. 2020

정면에서 마주하면

정조와 수원 화성 



수원 화성에서.

역사는 흐르지만 문화재는 그 자리를 지킨다.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 불리는 수원 화성은 1796년(정조20년)에 축조되었다. 애초의 계획으로는 10년이 소요되리라 여겼지만 그에 절반도 미치지 않는 2년 9개월 만에 성을 뚝딱 만들어 버렸다. 요즘 같은 시대라면 부실공사를 운운하겠지만, 당시 이렇게 빠르게 성을 지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성과급제에 기틀을 둔 철저한 임금 지불에 있다. 조선 후기 성군으로 평가받는 정조는 성을 쌓는 일꾼들에게 일종의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동에 대한 값을 넉넉히 쳐주었다. 겨울에는 토끼털로 만든 귀마개를 보급하기도 했으니, 왕의 애민 정신은 백성을 향한 사소한 배려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다산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이용해 노동의 질을 대폭 향상시킨 것이다. 18세기까지 조선은 소가 끄는 대차를 제외하고 모든 일에 인력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실용성을 내세우던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 건축 기술을 한 단계 올려놓았는데, 거대한 돌덩이를 1/8 무게로 들어 올리는 거중기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거중기 이외에도 녹로와 유형거는 수원 화성 건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날 맑은 오후 수원 화성을 찾았다. 오랜 문화재를 소중히 여기는 정조의 후손들은 스스로 굴러가는 탈것에 몸을 실어, 빨강과 파란 불빛에 맞춰 성곽을 둥글게 돌았다. 탈것이 없는 후손들은 뚜벅뚜벅 장안문을 가로질러 '정조로'를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이런 상황을 재밌게 관찰하는 나와 달리 대부분의 후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혹은 귀마개는 아니지만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귀에 꽂은 채, 입은 하얀 천으로 꽁꽁 싸맨 채, 화성 주변을 걸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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