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이별 중
“보고 싶어”
버튼 몇 개 누르면 전할 수 있는 마음인데도
그 방법이 너무 간단해 되려 속으로 삭히는 게 익숙해졌다.
그 네 글자 뒤엔
상대방의 감정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
어느 날 그가 덥석 내 손을 잡는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말아야 할 초연함이 요구되는 말
밤늦게,
술에 취해,
무서운 꿈을 꾼 다음 날 아침,
전화로, 문자 메시지로 전하던 투정
또는 습관과도 같았던 말
“보고 싶어”
이제는 그 간지러움을 참아야 하는 나이,
그 말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다 하더라도
한번 더 생각하고 꺼내야 하는 나이가 됐다.
정말 못 참을 것 같을 땐
이불을 덮고 엉엉엉 울며
혼자 말하게 되는 현실은 어쩌면
어른이 되었기 때문.
그런데 우리가 꼭 책임질 말만 하는 건 아닌데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아끼게 됐는지 모르겠다.
"보고 싶어"
보내 놓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아무 답이 없더라도 울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렇다면 덤덤히 꺼내볼 수 있는 말,
어른의 연애
어른의 보고 싶다는 말은 그런 조건을 달고 있다.
*이 글은 <어른의 연애>에 수록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