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할수록 기억은 선명해진다.

발행물4, 군에서 누군가에게 쓴 편지

by 민성


KakaoTalk_20200831_203305679_01.jpg 영화를 다루는 독립 매거진 Prism Of의 이터널 선샤인 특별본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을 보셨나요?


영화관에 특별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순간 바로 광화문에서 이수까지 달려가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가 제 첫 번째 이터널 선샤인이었고, 옆엔 좋은 친구가 있었죠. 영화는 재밌게 봤어요. 숨 가쁘게 뛰어가서 비집고 앉았던 상영관에선 영화가 이미 시작해있었고, 사람으로 가득했었어요.


최근에 두 번째 이터널 선샤인을 만났어요. 주말에 사무실에 앉아서. 자막이 없어 마치 영어 듣기 평가하듯 인물의 대화에 집중했던 기억이 나요. 한마디라도 더 알아듣기 위해서 몇 년 전에 봤던 영화 속 자막과, SNS를 떠돌아다니는 영화 장면 캡처 이미지를 되새기면서.


음미할수록 기억은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기억은 넓고 방대해요. 그래서 영화 속 조엘이 기억을 지우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조엘의 기억은 되려 선명해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무리 소중한 기억도 두고두고 상기할 기억으로 선택받지 못하면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의식으로 넘어갈 테고, 명을 다해 사라지거나 다시는 들춰보지 못하도록 깊은 곳으로 갈아 앉을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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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너무 소중하다고 한들. 그때의 감정이 너무도 소중해 고이 쌓아 잘 보관해둔다 한들, 언젠가 그 기억과 똑같은 상황을 마주한다 해도 그때와 동일한 감정을 느끼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조엘은 기억을 지우는 과정 동안 일련의 기억들을 다시금 생동감 있게 음미할 기회를 얻은 거죠. 클레멘타인과의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한들 모든 기억은 조금씩 뭉뚱그려져 하나의 큰 모호한 기억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하나씩 지워나가는 과정에서 그는 멀리서 기억을 상기하는 것이 아닌, 그 현장에서 다시금 체감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죠. 참 역설적이지만 기억을 지우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영화 속 조엘은 그 기억이 그만큼 자신에게 깊은 존재였단 것을 실감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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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가 보고 싶기도 해요.


민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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