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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May 02. 2022

내가 사는 고향은

에세이_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일상들

N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1995년 우리 가족은 전세로 살 수 있는 집을 찾다 서울 변두리 중 한 곳인 N으로 왔다.

나는 5살이었고 그렇게 N은 고향이 되었다. 


하지만 연어가 굳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 하듯, 

2011년 우연히 내가 태어난 대학 병원의, 그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이에 맞춰 아빠는 좀 더 비싸고 투자하기 좋은 지역으로 평가받는, 

N보다는 서울의 중심에 가까운 그곳으로 다시 이사 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우리는 연어가 아니기에 적당한 선에 집이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N의 집값이 1억 오르면 그곳의 집값은 3억씩 오른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N에 살고 있다. 

N은 그래서 고향이자 현 거주 지역이다. 

서울 변두리 지역답게 ‘힐링’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연과 교육'을 내세우는 이곳, 

돈 되는 특징이 없어 좌절하는 구민도, 

생각보다 있을 건 다 있어 그럭저럭 둥지를 틀고 만족하는 구민도, 

우리처럼 만족하면서도 떠날 타이밍만 보는 구민도 모두 함께이다.


복잡한 연립주택 골목에 살던 엄마는 빽빽이, 하지만 규칙적으로 아파트가 들어 찬 이곳이, 

나무가 많은 근린공원과 아파트 단지 내 차도를 지나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는 이곳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5살의 나도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아무리 도색을 해도 함께 나이 먹은 티가 나는 낡은 구석들만 눈에 띄어 씁쓸하지만, 

한참 빨간 머리 앤과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심취했던 어린 시절, 

이곳은 그 세계의 무대였다. 


긴 나무들이 촘촘히 옆으로 펼쳐진 공원 길은 

앤이 매슈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초록색 지붕 집으로 가던 설렘 가득한 오솔길이었고, 

빨강 노랑 낙엽이 쌓인 잔디밭 어느 곳은 

모험(높은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눈에 보이는 온갖 경사로를 오르거나 뛰어내리던)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들의 푹신한 쉼터이자 포토 스폿이었다.

겨울에는 하얗게 쌓인 눈에 발을 푹푹 집어넣으며 그 무대를 걸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부드럽고 폭신한 흰 빵의 나라가 이곳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을 걷는 즐거움도 이곳에서 처음 배웠다.

눈길을 걷다 보면 온 가족이 나와 만들었을 나만한 눈사람이 아무 곳에나 있었다.

지금은 기겁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절 각각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무언가를 공통적으로 배워 온 

동네의 6, 7세 꼬마들은 눈에 띄는 공원의 진달래 꽃들을 모조리 따 꿀을 쪽쪽 빨아먹으며 뛰었다.

사실 무엇이 진달래이고 철쭉인지 무지했으나 탈 난 적은 없었으니 모두 진달래만 따먹은 듯하다. 

도시의 아파트는 어느새 차갑고 매정하며 여러 면에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지만, 

그때  N의 아파트는 좀 달랐다. 

좀 다른 시끄러움이 가득한 공간이었고 다들 시끄러워서 괜찮았다.  


그렇게 잘 크고 있는데 아빠가 물었다. 

“우리 여기로 이사 갈까?” 아빠는 이때부터 꾸준히 큰 그림을 그렸다. 

후에 자식들이 선이라도 보게 되면 꿀리지 않을, 한강이 더 가까운 그런 동네로 가고 싶어 했다. 

지금보다 더 낯을 가리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11세의 나는 그러면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로 아빠는 이사를 포기했다. 

그는 아직도 가끔 그때 이사 갔으면 몇 배의 가격이 올랐을, 

그 지역을 보며 장난 반 진심 반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그럼 난 “뭘 그렇게 민주적이고 그랬어. 애 몇 번 울다 말았겠지.”라며 맞받아치지만 

실은 그도 투자에 확신이 없었던 건 아닐까 의심한다. 

그때의 부모님은 또다시 빚을 내 집을 사기에는 어리고 소심하지 않았나 하고는...

이상하게 가족들에게 죄인이 된 기분이라 다시 그렇게 죄의식을 토스한다. 


26년이 넘게 N에 사는 동안 건물도, 가게도, 사람도 많이 바뀌었다. 

옛날 옛적 '미도파'가 '롯데' 백화점으로 바뀐지는 한참 되었고, 

갑자기 별다방이 한 두 곳 생기더니 버거킹에 이어 무려 쉑쉑이 들어왔으며, 

‘N에 이런 감성 돋고 힙한 곳이!!’하는 곳들도 골목골목 드물게 아주 천천히 생기고 있어

오랜만에 N에 설렘을 느끼게 한다. 

방임되어 쓰레기와 물 비린내 냄새를 풍기던 동네 하천은 

어느새 이곳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자연스러우며 인공적인 공간이 되었다. 

봄 어느 때에는 연둣빛 새싹과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혹하게 하고 

귀여운 새끼 오리들이 엄마 오리를 따라 물살을 타는 모습이나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하는 백로, 왜가리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하지만 어느 때는 오로지 인간만 보인다.

너무나 정직한 하트 모양의 장미밭 이라던지, 날개가 그려진 벽화 라던지, 

기후 위기와 그린 뉴딜 정책은 아랑곳하지 않고 뜬금없이 '더위 극복 생수 나눠 주기 행사'를 진행한다던지... 

어떻게든 예산을 소진하려는 눈물겨우며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 중 가장 자연스럽지만 아쉬운 것은 사람의 변화이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며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나름 버스 두 정거장 거리의 고등학교를 다니며 세상을 넓혀갔다. 

우리 대부분은 N의 유명 학원가나 도서관, 역 근처 어딘가에서 볼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동네 친구들은 N에 있었다. 

우리는 떡볶이 집에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나 이제 동네 친구라는 것은 없다. 

이곳에서 만난 옛 인연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른 동네로 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이면 N에서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만날 때마다 하지만 똑같은 포인트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이야기들을, 

어느 교수가 말하기를 정말 영양가 하나 없는 이야기들을 이어나간다.


종종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익숙함과 편안함이 아닌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다. 

새로운 동네 지도를 그리고 싶다. 

아무리 소소한 것이라도 맘에 드는 이곳저곳을 다시 익히고, 

홀로 새겨 두고 평을 내리는 과정을 겪고 싶다. 

N의 사람들은 준 경기도인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른 동네 사람들과의 약속은 1시간 이상 이동을 기본으로 삼기에 

난데없는 N의 대각선 끝, 뭐 이런 곳만 아니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너그러움이 깡그리 사라져 이제 모든 곳을 가는 게 지치는 시기가 있다. 

머나먼 이동 거리와 시간, 이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어 돈은 없지만 이사를 꿈꿔본다. 

하지만 안다. 

앞으로 혼자서는 절대 지금 보다 아늑한 곳을 찾아 살 수는 없겠지. 

이 지겨움과 권태를 받아들인다.

좀 더 지켜보기로 한다. 

지겨워도 곧 다시 애틋해질 N, 내가 사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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