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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Apr 02. 2022

다시 학교에 다닙니다

에세이_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일상

“제가 하고 싶은 일은 학생들이 새로운 배움과 경험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진심 반, 읽는 사람의 취향 반을 섞어 호기롭게 자기소개를 했다.

몇 번의 돈 벌 길이 무산되고, 

그저 익숙해진 만큼 지겨운 이 과정이 끝나기만을 바랬다.

그렇게 앞으로의 인생에 없을 줄 알았던 초등학교에 한 번 더 발을 들였다.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아닌 초등학교라니...

임용시험을 포기한 후 ‘학교’는 여우의 신 포도였다.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쭉 뻗으면 닿을 것 같았는데,

얼른 그 포도를 입에 쏙 넣고 단물만 쪽쪽 빨면 될 줄 알았는데,

나의 몫은 없었다.

이후 무작정 학교를 부정하곤 했다.

     

‘학교에서는 제약이 너무 많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없잖아.

(뚜렷한 교육방식 및 내용 없었음.) 

아, 그리고 나는 책임감이 없어서 안돼. 

게다가 난 새 학기 증후군이 있어. 

아무튼 교사 안 해. 내가 안 해.’

      

유치하지만 더 이상 손을 쭉 뻗어 발을 동동거릴 힘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아마 중학교나 고등학교 기간제 자리였다면 지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련이 없다고 하지만 괜히 기가 죽은 채로 열등감을 품을 것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부딪히는 것과 피하는 것, 

스스로와 괜한 기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현재 이 자리를 무사히 스쳐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오랜만에 마주한 학교는 이미 자유를 맛보아 

생각과 목소리만 더 커진 어른에게 참으로 불합리한 기관이었다.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규칙은 아래와 같다.

     

-복도에서는 오른쪽으로 사뿐사뿐 걷고 이야기하지 않기

→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부터 몸이 근질근질해 리듬을 타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흥겨웠고 학교 복도에서 떠드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추억인지 너무 잘 아는 어른이 되어버려

종종 풀어주고 싶었다.


-허리는 쭉, 목도 쭉, 손은 다리 위에 가지런히 두고 앉기

→ 하지만 어른인 나도 이런 바른 자세를 10분 이상 유지하기 너무 힘들다.


-받은 음식은 다 먹기

→ 하지만 사람이 먹고 싶은 만큼 먹어야 즐겁지 않겠는가, 편식의 경우 어차피 나이 들면 식성이 변하더라. 그리고 생각보다 급식이 맛없어 어린이들의 고충이 이해된다.


-걸을 때는 앞사람 머리를 보고 줄 맞춰 걷기

→ 하지만 똑같이 생긴 옆 반만 해도 궁금한데 학교 이곳저곳이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앞사람 머리를 보고 걸으라는 잔소리를 하면서도 

걸어 다니는 곳곳을 모두 담아두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내 눈에 담아둔다.


등등


방심한 사이 너무 사랑스러워진 존재들에게 눈감아 주고 싶은 것 투성이었지만

잡으려는 손을 다시 오므려주며,

“앞사람 머리 보세요, 부지런히 씹으세요.”라는 이상한 말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맘껏 뛰어놀고 친해지고 이야기하고 먹을 수 있는 것만 자신의 속도대로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이상한 잔소리를 하다 보니 

자꾸 이 불합리한 기관의 말에 설득되기 시작했다.    

 

“아직 ‘아가’라고 부르고 싶은 ‘어린이’ 여러분, 이것이 사회입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존댓말과 인사를 해야 하며, 

이 작은 사회에서는 물론 앞으로도 함께 사는 구성원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늦거나 능숙하지 못한 친구에게는 화를 내지 않고

흥이 나는 대로 뛰거나 크게 몸을 움직이면 

누군가가 다치거나 방해받을 수 있기에 조금 참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어진 것들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받을 줄 아는 것,

몸을 아프게 하는 나쁜 습관이 생기기 전에 미리 바른 자세와 태도를 익히는 것,

모두가 안전하고 건강한 생활을 위해 우리 어린이들 노력해줘서 고맙습니다.”     


새삼 이런 규칙들을 다시 배우며, 

나는 오늘도 어린이들의 반말과 수다와 응석을 받아주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상한 잔소리를 먼저 한다.     


다시 어린이들과 똑같이 학교에 다니며,

은근히 중독적인 동요를 조심스레 따라 부르고 ‘칭찬의 박수’를 크게 친다.

조그만 것에도 까르르 웃는(불행히도 웃음 포인트를 공감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아직 모든 것이 새롭고 힘이 넘치는 어린이의 마음을 빌려 다시 배워본다.

언제고 상처받고 다칠 수 있는 이 사회에서 덜 다치고 씩씩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한없이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세상에 살다가도 이내, 


‘제대로 된 홈스쿨링을 시키지 못할 바에 역시 학교에 보내는 것이 낫겠구나.’

‘아, 이래서 아이를 키우려면 돈이랑 마을이 하나 필요하다고 하는구나.’

‘말대꾸할 수 있는 어린이는 사실 엄청 똑똑한 거구나.’

‘저 J형 어린이는 앞으로 인생이 좀 더 피곤하겠구나.’ 


이런 것들을 더 깨닫고 배우는 어른의 마음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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