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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Mar 20. 2022

용서의 몫

에세이_'나'와 '생각들'

나는 용서한다. 

세상에서 제일 탓하기 쉬운 사람이 있다. 

내게 제일 가까이 자리한 사람, 엄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랑하는 만큼 많은 상처가 있고 

그 상처의 딱지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기도 전에 기어코 서로의 딱지를 뜯어냈다. 

그렇게 사랑이 가려질 만큼 생채기를 쌓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낯간지럽고 노력이 필요한 사이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아빠를, 동생은 엄마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외양뿐만 아니라 안까지 그렇게 닮지 않았을까?

그렇게 달라서, 다른 게 싫어서, 

유독 엄마와 나 사이에는 맘 같지 않은 미운 말이 먼저 쏟아지는 건 아닐까? 


지금은 안다.

실은 우리가 참 많이 닮았다는 것을.

오랫동안 함께한 시간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실은 처음에 대한 부담감이 심한 우리가 서로에게 잘해야겠다는 압박으로 

서로를 어려워하고 그래서 실수를 많이 하게 되고,

이 정도 가까운 사이면 다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서운해하고 

서운한 만큼 솔직하게 마음을 알아달라고 으르렁거리기만 한 것은 아닌지.

그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은 아닌지.

그런 면에서 우린 꼭 닮았다.      


엄마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말 중 하나로

‘난 애 안 낳을 거야. 엄마 같은 엄마는 되기 싫어.’가 있다.

20대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받은 사랑만큼 상처도 많았기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점점 내가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과 같아질 수밖에 없음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이렇게 결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내가 싫어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엄마의 모습으로 자식에게 같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식에게 후에 후회할지언정 당시에는 진심일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직 없는 자식이지만 사랑하는 존재에게 똑같이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너도 꼭 너 같은 자식 낳아라.’

저주가 확실하다.     


엄마는 내게 공부를 시키면서 소리를 질렀고 밀었고 손에 잡히는 책으로 때렸다.

10살 수학 경시 대회에서 난 6개를 틀렸고 틀린 문제가 모두 단순 실수였다는 이유로 

플라스틱 구둣주걱으로 한 문제당 5대씩 해서 엉덩이 30대를 맞았다.

내 엉덩이는 보라색으로 파란색으로 멍이 들었고 붓기는 점점 단단해졌다.

그렇게 많이 맞은 건 처음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으로 마구 맞는 것보다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마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그것이 정말 현실이었는지 꿈이었을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아주 어린 나는 바닥에 누워있었고 

그런 내게 엄마는 지금도 안방에 있는 분홍 플라스틱 의자를 쳐들었다.

그 이후의 상황은, 그러니까 그것으로 맞았는지 아닌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엄마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냥 확실하지 않은 그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프루스트의 레몬 마들렌과 차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엄마는 아빠가 철들기 전인 상태에서 독박 육아를 해야 했으므로 

아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덩달아 나도 그에 맞춰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만 안다.


한참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시기,

“누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어보면

난 준비된 듯이, “아빠요. 근데 엄마랑 더 친해요.”라고 답했다.

아빠는 종종 짜증을 냈을 뿐, 아빠에게는 기억이 남도록 혼나 본 일이 없다.

아빠에게는 한 번도 맞지 않았다.

엄마는 종종 세상에 믿을 남자는 아빠밖에 없다고 주입시켰다.

맞다, 아빠는 단 한 번도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아빠는 기억에 없을까?     

아빠 환갑을 맞아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동생과 나는 아빠에게 카드를 썼다.

그곳에는 언젠가 부모님께 꼭 해주고 싶었던, 어디선가 본 말을 적었다.

아빠는 설레는 얼굴로 카드를 받고 바로 자신의 장소에 숨겨 

그때의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여 옮겨 적을 수 없지만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 내가 자식이 생기고 부모가 되어 엄마, 아빠가 이해되면 좋은 부모인 거래.

근데 나는 지금도 아빠가 이해되고 좋아. 

그러니까 아빠는 나에게 참 좋은 아빠야.’


이 카드를 쓸 때, 실은 엄마에게 하루빨리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엄마의 환갑 때까지는 너무 멀었다.     


지난 1월, 엄마와 단둘이 제주도로 1박 2일 여행을 갔다.

우리는 가기 전에 싸웠고 좋은 여행지에서도 싸울까 봐 각각 걱정을 했다.

일찍 시작된 피곤한 여행의 처음부터 나는 엄마에게 괜히 툴툴대고 싶었다.

아직 이전의 앙금이 풀리지 않아 화를 내고 싶었지만 

여행지에서 싸울 수 없어 참고 참다 보니(아니 참고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것도 꽤 볼썽사나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엄마랑 빗속을 걷는데 그 무언가가 이상하게 풀렸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식당에서 정갈한 정식을 먹고 또 컴컴한 빗속을 걷고

숙소에서 감귤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면서 속에 있는 말을 조금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아빠가 좋은 아빠일 수 있는 건 다 엄마 덕분인 것을 안다고.

엄마가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지 안다고.

나는 점점 아빠보다 엄마가 이해된다고. 

엄마는 너무 대단하다고.

엄마 기대에 못 미치겠지만 난 이제 조금씩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대충 이런 식으로 속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다.

그에 대한 답으로 엄마는 이제까지 우리에게 해주지 않은 결혼하기 전과 신혼의 엄마 이야기를 쏟아냈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결국 믿을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동생이 본 엄마의 모습은 이랬다.

엄마는 자기 고집으로 내가 임용시험을 보고 빛나야 할 20대를 절망 속에서 보낸 것 같다고,

이제라도 나이에 맞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울었다고 했다.

다시 3번째 임용시험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던 날, 

그래서 맘과 다르게 둘 다 조금씩 언성이 높아지고 울었던 날, 

엄마는 10살 때 내 엉덩이 30대를 때린 것을 사과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일을 너무 사과받고 싶어서 내가 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번째 임용시험을 떨어지고 나서는 그만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그만하고 싶다고 말을 할 수 있었다.


엄마를 알아가고 있기에 그때의 엄마를 용서한다.     

하지만 엄마를 용서하면서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겼다.

엄마에게 상처를 준 나.


7살 무렵인가... ‘엄마’를 주제로 글쓰기를 해야 했다.

학습지 선생님은 우편함에 원고를 두면 찾아가겠다고 하셨다.

엄마는 자신의 조그만 딸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썼을까 

먼저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우편함을 열었을 것이다.

마침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나고 써 내린, 엄마가 절대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쓴, 

그날의 일기를 읽었을 것이다.

그곳의 조그맣지만 가림이 없어 더 악독했을 말에 상처를 받아

어두운 방에서 혼자 눈물을 삼켰을,

주저주저하다 남편과 자신의 엄마에게 그 상처를 내보였을 젊은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그때의 나를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용서는 나의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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