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_<러브 앤 아나키>를 보고
오랜만에 사람 얼굴에 홀렸다.
그러니까 최근 유튜브에서 한 남자를 보았고
그에 맞는 달달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사랑에 빠진, 묘하게 미쳐있고 나른한 눈빛에 빠져
손가락은 다시 재생을 클릭할 수밖에 없었다.
‘망했어... 나 너 좋아하나 봐’
제목 역시 완벽했다.
대충 너에게 한눈에 반해 설레고 초조해서 미치겠다는...
영상을 본 건 2월 말이었으니 이른 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남주의 눈빛에 힘입어 넷플릭스에서 <러브 앤 아나키>를 정주행 하였다.
홀랑 빠진 상태에서 마침 시즌 2가 확정되었다는 희소식을 들어 더욱 두근댔다.
시즌 1은 총 8회로 한 회당 이삼십 분의 길이였고,
하루에 하나씩만 보는 절제를 계획해봤지만 4~8회는 결국 몰아 보았다.
달달함에 혹해 달린 이 스웨덴 드라마는 댓글에 적혀있듯 맵고 아린 마라 맛이었다.
그래, 적나라한 노출은 많으나 외설적인 느낌은 없었고
가끔 병맛을 뽐내면서도 B급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전복성을 가지고 있었다.
뭐 또 B급이면 어떠한가.
난 B급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A도 C도 아닌 그 중간을 유지하며 재미는 물론 의미를 가지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미 가진 것은 많지만 유독 ‘정상성’에 대한 강박이 있는,
자본주의적 성향의 남편도 가진 중상류층의 여주는 확실히 옭아 매인 환경에 처해 있었다.
역시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늘 못마땅해하는 엄마가 있는,
고향을 떠나온 노동자 계급의 남주는 나름의 일탈 중이던 여주를 알아보았다.
둘은 그들의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 수 있는 내기를 시작하는데...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일부러 성기를 노출하고
내기를 하다가 회사와 그들의 동료를 곤란한 상황에 넣기도 하며
결국 이 둘은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해방과 비슷한 섹스를 하는 사이가 된다.
마지막까지 또 한 번의 사건을 일으키고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끝나는 엔딩이 좋았는데,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결국 범죄이고 불륜이고 외도이지만
이 말들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이때만큼은 나도 주변을 생각하지 않고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싶은 것이다.
정치인과 힘을 앞세운 범죄자 외 그 어떠한 사람과 일에 대해
눈감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 사람이 지금 당장 숨 막혀 죽겠다고 하잖아!!’
누군가 ‘너 진짜 왜 그래?’라고 하면
답답함과 동시에 무언가 해낸 기쁨이 잠시 일렁이는
그러니까 이건 그냥 성장통이다.
한참 사춘기를 맞이하여 유독 세상이 더 어렵고 쓰린 딸에게
여주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해준다.
“처음엔 넌 씨앗이야.
그러다 블루벨이 되고 그다음엔 장미가 돼.
나무가 되고... 그러다 숲이 되면 굳건히 서게 돼.”
아마 스스로 되새기고 싶은 믿음일 것이다.
엄마에게 딸은 그럼 엄마는 어떠한 단계에 있냐고 물으니,
숲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라 답한다.
그렇게 숲이 되어 이쪽저쪽을 살펴본다.
살필 구석은 점점 많아지고 그 구석에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숲이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들도 있고 숲이 되어가며 합류하는 것들도 있다.
당연히 숲에서는 늘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때가 되면 변화가 찾아오지만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없는 곳.
아마 나무가 하나씩 자라 어느새 숲이 되었음을 알게 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는 순간이 찾아오나 보다.
그 순간 숲은 저마다 살아 있음을 내뿜으며 유독 빛이 난다.
언제고 불타고 황폐해질 숲이지만
꼭꼭 숨겨진 씨앗으로 언제고 다시 싹이 틀 수 있는
그래, 너랑 나는 모두 숲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