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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Mar 05. 2022

다정함을 먹고살고

에세이_'나'와 '생각들'

다정한 사람이 좋다. 

누군가 이상형을 물을 때면 마땅히 생각나는,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음~ 다정이 병인 사람 만나고 싶어요.”라고 한다.


서로의 다정에 치여, 매일 전해줄 수 있는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머릿속이 꽉 차게.

이건 분명 지금 받는 사랑과 우정과는 좀 다른 형태로 다가올 것이다.


더 알아차리기 쉽고, 

아리기보다는 그냥 하루를 몽실몽실 떠오르게 하는, 

아무 일 없어도 웃음부터 나오게 하는 그런 것.

그렇게 보드라운데 세상을 좀 더 단단히 짚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다정함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종종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을 주고받는데,

흔히 많이 하는 질문이어도 늘 상대의 답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누군가는 미식가답게 잊지 못할 음식을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며, 

누군가는 꼭 이 계절에 맞는 음식을, 또 누군가는 사랑과 추억이 담긴 음식을 답한다.

‘죽기 전 마지막’이라는 말에 신중해지며 

저마다 의미를 품고 꺼내놓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떡볶이요.”라고 싱겁게 답하곤 하지만,

(아니 바로 튀어나오는 데에는 그 나름의 각별함이 있을 수 있겠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가며 천천히 떠올리는 음식들이 아주 많다. 

최근에는 

‘죽기 전에 떡볶이를 먹으면 너무 자극적이려나, 좀 속 편하고 따뜻하게 죽고 싶다.’라는 

마음에 대답을 바꾸기로 했고 마땅한 걸 찾았다.     


초당 순두부를 이기고만 ‘아주 따뜻하고 구수한 누룽지와 이모할머니의 오이지’      

오늘 아침 식구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아침 식사를 한 나는 

누룽지에 곁들여 오이지를 다 먹어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참다 그냥 다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혼자 다 먹으면 미안하니까.

그리고 반찬을 넣으며 아직 다른 반찬통에 오이지가 가득한 것을 보고 안도했다.      


‘내일도 누룽지와 오이지로 살맛 나는 아침을 보낼 수 있겠어.’     


배가 아프지 않은 매콤함과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 만족감을 주는 오이지.

어쩌면 오이지 덕분에 누룽지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간 것일 수도 있겠다.     


죽기 전에 먹고 싶은 음식이 엄마도, 할머니도 아닌 이모할머니 음식이라니..

난 이모할머니 성함도 방금 엄마에게 물어봐서 알았다. 

8남매 중 막내로 엄마의 사랑을 가장 늦게, 적게 받고도 사랑이 넘치는 사람.

누구 하나 막내라고 더 챙겨주지 않지만 꿋꿋이 나이 많은 언니들을 돌보는 사람.

오랜 식당 일로 퉁퉁 불은 손과 무릎으로 

장조림, 대파, 톳 장아찌와 오이지를 담고 호박죽과 카레를 가득 푸고, 

스무 살이 넘은 애들 먹인다고 찰옥수수와 만두, 찐빵까지 꼭 사서이고 오는 사람.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둘째 언니의 딸, 손녀들까지 챙겨 먹이는 사람.

누가 돈이라도 줄까 봐 연락도 없이 와 손사래 치며 흔적도 없이 떠나는 사람.

연락을 받고 가보면 이것저것 가득 채운 통과 봉지로만 소식을 전하는 사람.     


“본인도 힘드신데 이렇게  자꾸 해오시면 어떡해...”라고     

이런 말을 괜히 하면서도 우리 가족은 맛있게 냠냠 식사를 이어 가고 

식은 찐빵까지 싹 비운다.

그리고 반찬들이 다 떨어져 빈 통을 씻을 때까지 그를 생각한다.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살리는 사람.       


그리고 모든 걸 피워내는 사람도 있다.

손 닿는 모든 곳을 말없이 깨끗이 닦고 닦으며,

손 닿는 모든 것이 필 수 있도록 살피는 사람.

엄마는 올해 9년 동안 다니던 학교를 옮겨 학교 미화 선생님과도 헤어져야 했다.

엄마는 종종 학교에서 집으로 화분을 들고 왔는데,

봄이면 꽃 화분을 가져와 우리 애들 좀 보라며 아침마다 웃고

가끔은 아주 좋은 향을 풍기는 허브를 가져와 주말마다 향 좀 맡아보라며 가족들을 닦달했다.

온갖 책임과 걱정을 붙들고 사는 엄마가 그때만큼은 환하게 웃었기에 

난 이럴 때 그에 잘 협조하는 구성원이 되기로 했다.

내 눈에는 여전히 예쁜 꽃을 피워 낸 화분을 보며 엄마는 종종 말한다.     

“우리 학교에서는 진짜 더 싱글싱글 예쁘게 피었는데... 여기 오니 시들시들하네...”     

미화 선생님 덕분이다.

아무리 시들어 가는 존재도 그의 손을 거치면 싱그럽게 피어난다.

엄마가 하는 학교 얘기 중 그분의 이야기가 그래서 제일 좋았다.

단 걸 먹지 않아도 단내가 나는, 

떠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면 한 달 전부터 우는 사람.

이제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제일 아쉽다.

엄마의 후임자는 화분 돌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엄마는 다행이라며 그의 사랑을 듬뿍 받은 화분들을 데리고 집에 왔다.     


이 사랑 많고 다정한 사람들을 듣고 보다 보면 

이 여리고 여려 부드러운 사람들은 왜 다정한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미 사랑과 다정함으로 가득해서 기꺼이 내어 주고도 별 탈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필요해서 온몸으로 우리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하자고 말하는 것일까.  

그럼 나도 다정함에 목매기보다는 저들과 같이 기꺼이 다정함을 내어 주고 싶다.  

꼭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듣기만 해도 좋은 이 다정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랑과 다정함만 골라 먹으며 그것에 치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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