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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Jan 24. 2022

밀려 쓰는 일기: 다시 서울로 D-4

에세이_잠시 여행 5

다행히 날이 많이 갰다. 

창밖을 보니 여느 때와 같이 파란 바다, 흰 구름, 그리고 바로 위 눈부신 햇빛이 있었다.

어제까지 머리를 굴려가며 어디를 갈까 고민했는데, 

결국 새로운 곳보다는 좋았던 곳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종달리로 향했다. 

종달리는 제주에 도착하고 다음날 걸어 간 첫 동네이다. 

그날 바람은 없었지만 하늘이 흐렸고, 

카카오 맵이 시키는 대로 가서 초록초록 빛나는 남의 밭을 실컷 구경했다. 

그때는 그게 그 유명한 당근 밭인 줄도 모르고 여행 1일 차답게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연신 사진을 찍었다. 

지미봉을 보며 밭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종종 길을 가로막는 짧고 긴 선인장을, 이곳에 사는 사람과 개들을, 아주 드문드문 관광객을 마주했다. 

사람이 없는 길은 외롭고 무서웠지만 막상 사람이 나타나면 괜히 경계했다. 


이번에는 좀 더 걷더라도 해안 도로를 따라 빙- 걷기로 했다. 

뚜벅이 여행 중 운 좋게 친구 차를 타고 이 해안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친구는 자기 친구의 외제차를 빌려, 이 길을 조심조심 달렸다.

그 와중에도 날씨와 풍경에 "좋다!!"를 쏟아내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나 역시 이에 맞장구치며 차 앞과 뒤를 틈틈이 바다를 열심히 보았다.

그럼에도 서울이 아니 곳에서 만난 우리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 길을 혼자 걸으며 친구 생각을 했고, 모든 게 낯설었던 첫날 생각도 했고, 

다음에 함께 오고 싶은 사람들 생각도 했다.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도 모든 게 길어져 지쳤을 때,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아니 이제는 그것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 둘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어느새 이 둘을 친숙하고 반갑게 여기게 된 스스로에 만족하며 열심히 걸었다. 

종종 길을 걷다 보면 돌고래 떼가 보인다던데 아예 바다만 보고 걸어고 돌고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 산책으로는 멋진 풍경이라며 위안하며...

아침의 바다는 어제와 달리 잠잠했고 늘 그런 것처럼 파랬다. 


하지만 다시 비는 왔다. 

오늘은 비 예보도 없었고 하늘이 파래서 우산을 놓고 나왔는데, 다행히 비는 맞을 만한 수준으로 내렸다. 

맞다가 서러워지면 어느 곳이든 들어가기로 했다.

처음 제주에 와서 돌아다닌 곳, 여기 종달리. 

골목마다 작은 가게와 카페, 식당이 숨어있다. 

이곳에서 찜 해둔 곳들을 탈탈 털기로 했다. 

먼저 그동안 잘 못 챙겨 먹고 다닌 나를 위해 

처음으로 식당을 예약해서 정성스러운 채식 한 끼를 대접했다.

따뜻하고 호화로운 식사에 허기만큼 쌓아둔 서러움이 녹았다.  

그릇을 싹싹 비우니 사장님이 가게 인스타에도 올리셨다. 

가고 싶었던 북카페에서는 처음으로 집중해 넘기지 못했던 책을 마저 읽었다.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눈이 돌아갔던 소품 가게에서는 나와 생각나는 사람을 위한 선물을 샀다.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쳤다 했다. 그래도 바다는 빛났다. 


처음 입은 꽉 조이는 밴딩 바지에 장이 함께 조였지만 다시 천천히 해안도로를 걸어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눈앞에는 분명 가득한 구름 속에도 해가 보였고 햇빛이 창세기인 마냥 바다와 성산일출봉에 쏟아졌는데, 

희한하게 나는 계속 비를 맞았다. 희한했지만 좋았다. 

뭐든 예상을 빗나가 기분이 다운돼도 언제든 해가 비출 수 있음을 알기에 괜찮아졌다. 

아.. 그런데 바지는 정말 안 괜찮았다. 

좋은 깨달음을 얻었고 장을 버렸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바지를 벗어던지고 침대에 들어가 몸을 말았다.

제주도에서 제일 따뜻하고 비싼 밥을 먹은 날 하필... 끝없이 음식을 되새김질했다.

덜 먹고 많이 걸어서 분명 살이 빠졌는데도 이러면 바지 잘못이지. 

장기는 힘들었지만 다리도 눈도 기분도 딱 파란 바다만큼 좋은 하루였다. 

부덕하여 돌고래는 보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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