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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Aug 12. 2022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에세이_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일상들

올해 여름은 걱정보다는 덥지 않은데, 역시 습하다.

이 계절에 취약한 건 확실히 더위보다는 습기다.

여름은 늘 호들갑과 다르게 찾아온다.

그래서 한 계절 앞서 다짐했던 한여름의 꿈들은 정말 꿈이 되어 버리고는 만다.

5월 어린이날, 어린이들의 열기와 빠르게 시작된 초여름에는 

올해의 진정한 여름일 것이 분명한, 7년 만의 ‘여름방학’을 기다리며 맘껏 꿈을 키웠다. 

그래서일까. 여름방학이 오기 전까지 재미가 없었다.

출근길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들으며 책을 보다 버스를 갈아타고는 

터널과 커브가 많은 도로의 272번 버스 안에서 쿨의 <해변의 여인>을 누른다. 

그럼 똑쟁이 유튜브는 쿨의 노래를 거쳐 거북이의 <빙고>, 코요테의 <순정>, 명카드라이브의 <냉면>,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로 이어지는 플레이리스트를 대령한다.

중간에 잠시라도 템포가 느려지는 음악이 나오면 가차 없이 다음을 누른다.

이 익숙하지만 무조건 손가락이나 발가락, 고개 중 하나를 까딱거리게 하는 여름 음악을 들으며,

‘이곳은 버스가 아니다. 나는 지금 서핑 중이다!’(서핑해 본 적 없음.)

주문을 외우며 괜히 손잡이를 잡지 않고 코어만으로 버텨보겠다 오기를 부리는 

재미가 감소하였다. 

작년에는, 재작년에는 분명 재밌었는데... 그 맛으로 여름을 보냈었는데.

올해는 신나는 여름 음악 대신 한을 담아 울부짖는 노래를 듣다, 

학교가 다가오면 괜히 학교에서 배운 잔잔한 동요 <여름 냇가>를 들으며 마음을 다스리고는, 

내리기 직전까지 메마른 눈을 꼭 감고는 안전봉에 매달리다, 

허겁지겁 오늘은 어디서 아아를 사갈까 고민하다,

간신히 한 모금 마시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이러는 건가. 더위를 일찍 먹었나. 

이번 여름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쉽게 여름에 기운을 내어 준 나는 꿈을 간소화하기로 했다.

조용한 바다 보며 멍 때리기, 초록이 무성한 숲 그늘에서 새소리 듣기, 

엄청 차가운 계곡물에 발 담그고 수박 먹기, 

땀이 흘러도 몸을 들썩이게 하는 여름 음악 들으며 산책하기.

이런 열망들은 한증막 같은 공기 안에서, 나의 안에서 쉽게 녹았다.

곧 창문을 열어 놓고 자다 차가워진 새벽 공기에 잠을 깨고 마는 9월이 되어서야 미련 가득히 되새기더라도...

그래서 사람들이 동쪽으로 남쪽으로 떠날 때 

난 그냥 서울과 이곳의 카페 구석구석을 지키기로 했다.

좋아하는 동네도 찜해 놓은 곳도 너무 많았다. 이곳에서도 할 것은 정말 많았다.

알 수 없는 여름처럼 변덕 부리는 마음을 누르고 다시 여름방학을 맞았다.

눈을 뜨면 나와 똑같이 방학을 즐겨야 할 엄마를 위해 일찍이 집을 나서 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4인 가족에게 집은 혼자 있어야 제맛이니까.

예년보다 신난 음주 생활에 알코올 섭취량이 늘었기 때문에 카페인이라도 줄이고자 

조용한 아침 카페서 아이스 허브티를, 술을 마신 다음 날에는 해장 삼아 수박 주스를 시킨다.

집 근처 넓고 화장실이 쾌적한 커피빈과 투썸, 비엔나커피하우스를 돌아가며

창가 자리에서 읽고 싶은, 읽어야 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써본다.

이내 카페가 소란스러워지면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자리를 옮겨 가고 싶었던 개인 카페를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에 가거나 

부비프에 놀러 가야지 한다.

카페와 무거운 책에 지치는 날에는 일찍 집에 와 

엄마가 해준 다던 콩국수를 먹고(진짜 일찍 들어오면 성가셔 하지만...) 

<오렌지 이즈 더 블랙>을 보며 이상하고 자유로운 여자들이 되고 싶어 하다,

이내 잔잔하고 호사스러운 여름방학에 감사하며 눈을 붙인다.

그런 다음 춤을 추러 혹은 모니터 앞이나 바깥으로 반가운 이들을 만나러 떠난다.

밤에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기를 바라면서.     


방학은 11일이 남았다.

기한이 있는 시간은 늘 아쉽다.

가고 싶은 곳은 반도 못 가본 것 같은데 벌써... 

서둘러 되는대로 약속을 잡고 예약을 해본다.

가장 꾸준하게 한 것은 춤을 춘 것, 아무랑 춤을 추고 스텝을 밟고 돌고 웃으며 맥주를 마신 것!

책을 읽고 독후감을 올리고 글을 쓴 것은 너무 잔잔해 임팩트가 없어

대뜸 책장에 ‘여름’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책을 골라 뽑았다.

이들과 함께 보고 싶은 책들도 뽑아 미션을 만들었다.

‘여름이 가기 전까지 이 책들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자.’

여름의 끝이 어디일지, 

새벽 공기가 차가워져 설레는 9월의 초중반쯤이려나,

개학을 기준으로 삼아 볼까 하다 그 중간의 8월까지로 잡아 본다.

여름 필독서「아무튼, 여름」을 읽고 나니 

여름에 대한 없던 생기와 애착이 피어나 조급해졌다.

이 날씨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딸을 보며 엄마는 내가 내가 맞냐고 물었다. 

“엄마, 시간이 없어!”

뒤늦게 여름 음악을 튼다. 읽었던, 사두었던 여름 책을 읽는다.

양산과 선크림 없이 햇빛 아래를 걷는다.

그리고 뒤늦게 쏟아지는 비를 맞는다.

이 심란함, 초조함, 재난, 이후의 시간 모두 여름이었지 알아차린다.     


어느덧 단맛이 빠진 수박에 엄마가 더 이상 수박을 사지 않겠다고 단언하여

보이는 족족 수박 주스라도 마시고 있다.

좋아하던 태국 음식점의 땡모반은 수박 슬러쉬로 변해 배신감을 안겼다.

아직 복숭아와 포도에게는 자리를 물려줄 수 없으니 계속해서 시도해봐야지.

여름엔 초당 옥수수라는데 처음에는 아삭함과 달달함이 놀라웠다가 

곧 옥수수가 단 건 역시 별로인 것 같아 올해는 주문하지 않았다.

대신 찰옥수수와 찐 감자, 단호박, 콩국수, 비빔국수를 성실히 먹는다.

얼음잔 생맥주는 기분 좋게 딱 500cc만 마시기로 한다. 

이르게 여름을 정리하다 보니 벌써 여름이 다 간 것 같아 내년 여름은 어떨까 상상하게 된다.

한적한 서해나 풀에 누워 물소리를 들으며 둥둥 떠다닐 수 있을까.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건 여름의 매미 울음밖에 없을까.

아, 꿀벌처럼 매미도 언젠가 사라질까.

그럼 그게 여름일까.

내년에 할 수 있을 것과 없을 것을 헤아려본다.

그럼에도 알찬 여름방학이 되기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함께여서,

지나가는 이 시간이 잡고 싶을 만큼 아까워져서, 

예년보다 푸릇한 여름이었다.     


*제목은 송지현 작가의 소설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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