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덕만 있을 뿐, 탈덕은 없다는 말이 맞다.
자신도 모를 어느 구석에
팔딱팔딱했던 덕후의 심장, 아니 마음인가?
난 늘 그것을 좀 갖고 싶었다.
그것은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언제 수면 위로 드러날지 모르게,
기약이 없는 채로.
그렇게 꽁꽁 숨겨진 빈약한 덕질의 역사
전성기는 아무래도 영화 <아가씨>였던 것 같다.
2016년 6월 1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등장했다.
덕질을 이렇게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사실 그전까지는 무엇이 덕질 인지 감도 없었다.
보통 가장 열렬한 덕질을 한다는 10대 때도
‘덕질’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건 없었다.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가 있으면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좋아하는 것,
CD를 사고 라디오를 챙겨 듣는 것.
이 행위에는 열망, 열정이 좀 부족하지 않나...
밤을 지새우고 가끔 학교쯤은 패스하고
학교 내에서나 밖에서나 하루를 가득 채워 사는,
가끔은 아티스트들의 탈선에 함께 붕괴되어 가는,
그리고 이어지는 뭘 모르는 사람들의 소리...
그럼에도 연대하고 꼿꼿이 갈 길을 가는
수많은 ‘카시오페아’, ‘핫티스트’들 앞에서
난 쪼그라들었다.
그들의 용맹함이 부러웠다.
가족력 때문일까.
엄마는 임영웅 씨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임영웅 씨가
엄마의 강력한 갱년기 비타민이 되어 주어 고맙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약했다.
내가 알기로 덕질은 그런 게 아니었다.
임영웅 씨가 나오는 방송, 라디오, 심지어 유튜브까지 TV로 연결하여 큰 화면으로 보고,
영웅의 앨범이 나오면 혹평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정을 붙이듯 종일 듣다,
우리에게 들키면 멋쩍게
듣다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얼버무리고,
영웅이 광고하는 피자를 사 먹고,
또 얼음 정수기를 살까 말까 고민하고,
딸의 배우자보다 영웅의 배우자를 진지하게 걱정하고(엄마는 그를 진심으로 아껴 차마 영웅 같은 사위를 데려오라 하지 못했다..),
아빠를 데리고 영웅의 고향인 포천에 놀러 갔지만
무조건적인 힘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시간과 돈만 썼다.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했다.
영웅 이전과 후의(어쩜 이름도 영웅이람!)
엄마는 분명 달랐지만 현생을 잘 지켜나갔다.
엄마의 덕질을 통해 모처럼 대리 만족을 하던 나는 싱거워졌다.
‘아, 우리 가족은 여기까지 인가 봐.’
그래도 엄마는 임영웅 씨라도 있지,
아무리 살펴도 아빠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 보였다.
평일 저녁 8시에 하는 드라마 혹은
KBS 주말 연속극을 보며 가끔 눈을 반짝인다는 것을 포착했다.
"아빠, 저거 좋아? 재밌어?"하고 묻는다.
곧바로 그냥 보는 거라며 부인한다.
가끔 덕질이 아니더라도
아빠의 삶의 낙, 활력소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정말 가족밖에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좋기도 싫기도 하다.
'참 불쌍한 남자네.'
가끔 그가 그 드라마를 보는 사람만 이해할
이상한 개그를 쳐도
너그럽게 웃어주겠다 다짐해본다.
나의 덕질 전성기의 증인은 동생이다.
동생 역시 가족력에 벗어나지 못해
지독히 하나에 사랑을 주지 못하는 종족이었다.
그녀는 온라인 세계와 거리가 먼 내가
각종 커뮤니티에서 뭔가를 찾고,
모르는 사람과 거래하고, 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슬며시 이 즐거움에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고는 ‘덕후’라 불렀다.
'그건 왜 샀냐고. 이번에는 좀 오래간다고.
아직도 좋냐고. 신기하다고.'
그럼에도 난 같이 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빛나는 발견들을 맘껏 떠들 수 있는 존재가 있어 마냥 좋았다.
내가 지금까지 내 손으로 열어본 것 중에서
이렇게 예쁜 게 있었나?
같은 것을 사랑하는 미지의 사람들과의 키득거림,
밈, 단체 행동, 금손들의 2차 창작물 감상,
오가는 굿즈 속의 다정함.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과 파고드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는
지친 현생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난 그해 임용시험에 떨어졌다.
그래도 히데코가 오물거렸던 포도맛 사탕을 빨며,
굿즈 후드티를 입고는
<아가씨> 창조주의 교보문고 사인회에 갔다.
그와 동시에 광화문에서 열심히 ‘대통령 탄핵’을 외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후 <콜미바이유어네임>, <쌈마이웨이>, <청춘시대>가 있었다.
어쩌면 덕질을 한다기보다는
인터넷 소설의 세계에 빠져 엄마 몰래
책 대여점을 열심히 들락거렸던 10대 때와 같이
그저 용감하고 치명적이며 열렬한 사랑 이야기에 약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사랑이야기에도 환해지더라.
이것이 나에 관해 많은 걸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에 용기가 없고 안정지향을 바라는 나라도
마침내 이유를 찾지 못할 사랑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를,
그런 종류의 사치를 누릴 수 있기를,
절대적으로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영원도 확신도 없는 세계에서 사랑을 하겠다며,
그러니 미결이 되겠다는 서래에게
다시 많이 설레고 말았다.
긴 기다림을 걸쳐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는 여자들이 좋았다.
“그거 봤어?
어떤 사람은 초밥을 들고 와서 영화를 보더래.
뭔가 하고 봤더니
탕웨이가 초밥 먹을 때 꺼내서 같이 먹더래.”
”신박한데?
그럼 난 같이 브레스 민트를 먹어야겠다. “
이번에도 내세울 만한 덕질은 못되겠지만
가는 길이 외로울 것 같지 않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글렀으니
올해는 <헤어질 결심>과 함께 해야지.
아무래도 이 마음과 함께
정서경 작가님, 박찬욱 감독님을
깊은 바닷속으로 던져버려야 할 것 같다.
그 속에서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다음 작품 생각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