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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Sep 03. 2022

즐거운 혼잣말

에세이_단상

‘나에게 노래란?’

이슬아 작가님의 「아무튼, 노래」를 읽고 독서모임에 갔다.

여기서 발제자님의 질문, ‘여러분에게 노래란?’     


사실 내게 ‘노래’는 겁나는 것이어서 아무리「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한다 해도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아무튼, 노래」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본격 북 토크 전, 노래에 엄청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운을 뗐다.

나에게 노래방은 언제부터인가 ‘탬버린 사수’였노라고.

정말 언제부터인가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신명 나게 흔들기 시작했다.

몸도 같이 오른쪽, 왼쪽으로 들썩거리며 움직인다.

손가락, 발가락도 까딱까딱 리듬을 탄다.

하지만 노래는 뱃속 내장기관이 아니라 입안에서만 맴돌다 가볍게 흩어져버렸다.

신나게 탬버린을 흔들며 마이크 없이 후렴구를 불러대는 나를 보고 

동행은 급히 마이크를 쥐어주었지만 

잡는 그 순간 흥이 깨지고 마는 걸...     


자, 노래의 흑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분명 엄마와 외할머니 말로는 난 어렸을 때 노래를 참 잘 부르는 아이였다고 한다.

마치 카세트 속 동요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처럼 

A면, B면 질리지도 않는지 그것을 듣고 율동까지 해가며 

종일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잘 불렀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다.

피붙이 4살 아가가 노래를 부르는데 당연히 사랑스럽고, 

시간이 지난 만큼 그들의 기억은 아주 많이 미화되었겠지.

그래도 그때는 노래를, 노래 부르는 것을,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전교에서 첫 번째로 했던 <에델바이스> 가창 시험,

그전까지 뭔가에 젖어 노래를 꽤 하는 줄만 알았는데 

처음으로 덜덜 떨리는 나의 목소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짧은 순간 이후로 노래는 무서운 것이 되었다.

만나면 친구들과 노래방으로 가, 거침없이 번호를 누르고 

마이크를 잡고는 장나라, 이수영, 빅마마, 휘성, 체리필터의 노래를 불렀던 

나의 목소리는 어느새 작아져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에 숨었다.

하필이면 그때 빈 카세트테이프에 

브리트니 스피어스, 웨스트 라이프, 에이브릴 라빈 등 

팝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고 녹음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런 날에는 친구 집에서 멀뚱히 앉아 그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점점 정말 친하고 편한 친구들이랑만 노래방을 갔다.

그곳에서는 <네모의 꿈>을, 곧 중단해야 했지만 왠지 불러보고 싶었던 

에픽하이와 드렁큰타이거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사람이 없는 노래방에서 이어지는 보너스에 

마지막 최최최종 노래는 무조건 김아중의 <Maria>였다.

왜 <Maria>였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마지막이다 싶으면 Y는 <Maria>를 눌렀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우리 각자는 

탬버린과 마이크를 들고 

이미 제 몫을 다한 목을 붙잡고 

마지막을 불태웠다. 

그렇게, 저 흰 구름 끝까지 날아가자는, 

거친 파도 따위 상관없다는 <마리아>와 함께 

우리의 10대가 끝났고 이후 난 노래가 정말 더 무서워졌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가고 싶지 않은 학과 행사 시간을 기다리며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동기, 선배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다.

얌전히 탬버린만 치고 있었으면 될걸,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나는 마이크를 잡고 

드렁큰타이거의 <Monster>를 불렀다.

세상에 “발라버려!” 라니, 왜 그랬을까.

학과 행사에 가기 싫어 스트레스를 받았나...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옆에 있던 보수적인 남자 선배 얼굴이 벙쪘던 것 확실하다.

난 마이크를 놓았고 그날 이후 기쁘게도 노래방 갈 기회는 없었다.

아니, 아예 그 기회를 차단해버린 것인지도.

노래방을 좋아할 것 같은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 대신 술을 마시고 아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랑만 놀았다.

억지로 노래방을 가게 되면 탬버린 솜씨를 뽐냈다.

안 그럴 것 같은 애가 신나게, 탬버린을 죽기 살기로 흔들면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봐줬다.

이럴 땐 다행이다. 이렇게 생겨서....

노래방은 나보다 노래를 아주 조금 더 잘 부르는 동생이랑만 가기로 했다.     


그럼 나에게 노래란 ‘겁’일까?

아니다, 분명 노래 부르는 걸 무서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집에서는, 그리고 아빠 차에서는 누가 있건 없건 내키는 대로 노래를 부른다.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울부짖는 발라드, 결국 정점을 찍고 마는 뮤지컬 OST, 신나는 디즈니 OST, 

상큼한 아이돌 노래 후렴구, 어릴 때 배웠던 동요까지... 

그때그때 즐겨 듣던, 흠모하던 노래를 성에 찰 때까지 부르다 지치고 만다.

그렇게 맘껏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생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저 에델바이스 좀 말려봐!”

“놔둬, 저렇게 좋아하는데.”


비록 아직도 중학교 1학년 가창 시험 흑역사로 나를 놀리고 

라디오 음치 경연대회에 나가 냉장고나 타오라던 엄마지만

이럴 땐 고슴도치가 되어 나를, 나의 노래를 토닥거려 준다.

그런 엄마의 토닥거림에 노래는 줄어들다 더 커진다.     


“민정님에게 노래란?”

“음... 저한테 노래는 즐거운 혼잣말이요.”

혼잣말일 때만 즐거울 수 있는 나의 노래.

아무에게 들리지 않아도 되는 나의 노래.

내 목에서 나오고 내 귀에만 들리면 되는 나의 혼잣말.

짝짝짝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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