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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Dec 12. 2017

인생 수업

강순전·이진오-철학 수업

버스를 타다 보면 재미있는 광경을 종종 목격한다. 분명 내리기 전에 카드를 찍은 사람인데 내릴 때가 되자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단말기에 카드를 더 찍는다. 기계가 “이미 처리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 멋쩍은 듯 혹은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에서 하차한다. 


한창 버스를 많이 타고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 (중학교와 대학교는 집에서 걸어 다녔음)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자기가 카드를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기억하지 못할까?’라는 의문과 조금의 한심함이 묻어있는 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나도 종종 내가 단말기에 카드를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고민이 시작된다. ‘찍은 거 같긴 한데 나를 믿을까 아니면 혹시 모르니 카드를 찍을까?’ 물론 고민의 결론은 단말기에 카드를 찍는 행위로 귀결된다. 환승을 해야 하는데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1,200원을 날릴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카드를 찍으면 어김없이 단말기 누나가 “이미 처리되었습니다”라며 조소 섞인 대답을 날린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 막 30줄에 들어선 내가 노화를 들먹이는 건 남과 나에 대한 실례다. 왜 1분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할까 생각해보면 그 대답은 너무도 일상적이다. 그제와 어제가 같고 어제와 오늘이 같기 때문이다. 

똑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 똑같은 버스에 덜 깬 몸뚱이를 집어넣고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업무를 한다. 어제와 오늘이 같으니 오늘 한 일이 어제 한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쓸쓸해진다. ‘어제와 오늘이 같으니 오늘과 내일도 같을 텐데 이런 삶 속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일 자체가 행복한 극소수의 사람을 빼면 일이 주는 행복은 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일이 주는 성취감 + 적절한 보상. 성취감이야 많은 곳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성취감은 프로젝트를 끝냈을 때 당연히 따라 나오고 보고서가 깔끔하게 작성됐을 때, 심지어 커피를 탔는데 색이 곱게 나왔을 때도 알량하지만 성취감이 생긴다. 그런데 이 보상이란 놈은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없기에 (갑님께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시겠지만) 여기서 많은 불행이 시작된다. 보상이라고 하면 너무 스펙트럼이 넓을 수 있으니 월급이라고 하자. 월급은 갑과 을의 투쟁이다. 최대한 적게 주고 싶어 하는 갑과 최대한 많이 받고 싶은 을의 투쟁. 이 투쟁에서 강자는 당연히 갑이다. 양보는 힘 있는 자가 하는 거라고 배웠건만 이놈의 공교육은 어떻게 된 게 시험지만 벗어나면 실제와 다른 게 수두룩하다. 갑님은 “네가 한 만큼 가져가는 거다. 열심히 하면 많이 벌 수 있다.”라며 세치 혀를 놀리시지만 그분들이 생각하는 ‘열심히’와 을들이 생각하는 ‘열심히’의 갭도 상당한 듯 보인다. 이 주파수가 안 맞으니 제대로 된 이야기가 오갈 수 없다. 그렇게 행복은 오늘도 저 멀리 떠내려간다. 


철학(哲學)의 ‘哲’ 자는 ‘知’와 같은 뜻이다. 그래서 철학이란 뜻은 아는 것을 사랑한다 혹은 아는 것을 배우는 학문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philosophy’인데 이는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한 말이다.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란 접두사고 소피아는 ‘지혜’란 뜻이다. 즉 필라소피아도 아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란 단어를 현학적이고 뜬구름 잡는 학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명한 철학자의 책 몇 권만 읽어봐도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이고 분명히 한글로 적혀있는데 도통 무슨 소리 하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철학을 좋아하고 좋아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의 정의는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행복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삶의 양식이 달라지고 선택도 갈린다. 누군가는 하루의 쾌락의 총량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고 누구는 내일 세상이 무너져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다. 남의 행복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의 주장도 틀리지 않았다. 모두 존중받아야 할 각자의 철학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무지하다. 길고 긴 시간 동안 공교육을 받으며 90% 이상의 사람이 학사모를 쓰지만 정작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해야 행복한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나의 시험을 통과하면 더 어려운 시험이 존재하는 굴레에 빠져 행복하기보단 안도하는 삶을 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철인처럼 강한 정신력과 자존감으로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의 수많은 약한 영혼들은 다양한 경험을 해본 현인들의 삶 속에서 자신과 맞는 행복을 찾는 게 좋은 경우도 있다. 
   
<철학 수업>은 마치 뷔페 같다. 주체적인 자아인 ‘나’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취사선택하면 된다. 



 이 책은 대학교 교양 과목인 <철학과 글쓰기> 과목의 교재였다. 대학 수업의 특성상 책 전부를 훑진 못했지만 따로 몇 번이고 읽었던 교재다. 
   
챕터 중간중간 주제와 연관해 생각해볼 만한 미술 작품들이 함께 수록돼 있어 책의 깊이를 더 해준다. 예술이란 철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과거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걸 최고의 선(善)이라고 과거의 예술에서 철학적 의제를 던지고 생각하는 예술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뷔페라 특정 음식에 대한 깊이를 찾기엔 부족하지만 뷔페만의 매력이 있다. 양껏 먹을 수 있고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을 수 있다. 중, 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잘 쓴 내용이지만 그 깊이는 의외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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