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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Dec 17. 2017

고승의 깊이

법정- 맑고 향기롭게

 올해 4월에 나주로 답사를 갔었다. 백제의 미학을 느끼기 위해서 간 답사였다. 백제의 미학은 <삼국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이불루 화이불치)

하지만 백제의 섬세한 미술품보다 나를 사로잡는 것은 나주의 자연경관이었다. 드넓은 나주 하늘에 귀엽게 떠있는 구름 몇 점, 4월임에도 아직 영롱한 빛을 잃지 않은 동백꽃, 노란 유채꽃이 주는 봄의 내음이 나에겐 훨씬 더 멋져 보였다. 이처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 주지 못하는 역동성과 영혼을 울리는 공명이 있음이 분명하다. 

 2010년 3월 11일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서적은 일반 서적이 주지 못하는 감동을 준다.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힐링 열풍에 휩쓸려 힐링 도서를 몇 권 읽어보았다. 개인차가 존재하겠지만 내가 읽은 몇 권의 도서는 전혀 '힐링'이 되지 않았다. 조금의 수고를 들이면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는 좋은 글귀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괜찮아’ ‘힘내’라는 계속 읽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꺼낸 책은 법정 스님의 산문집 <맑고 향기롭게>였다. 법정 스님의 모든 책이 그렇듯이 이 책에서 권하는 삶의 방식은 소박하다. ‘너는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행복한가?’를 물으면서 주체적인 삶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곤 곧이어 ‘단순하고 간소한 삶’ ‘내가 사랑하는 생활’을 담백하게 말씀해주신다. 

 주체적인 삶과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완성시키는 것은 자연이다.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는 것을 항상 역설하시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비로움을 예찬하신다. 이런 모습은 ‘온종일 주워섬긴다 할지라도 자연의 혜택은 말로는 다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문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자연이 가장 큰 선생님이란 걸 잘 알고는 있다. 하지만 정확히 자연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정확하게 집어낼 수 없는 나 같은 범인들에게 이 책은 최고의 학습서이며 인생의 예습서이다. 그리고 최고의 자기개발서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자연은 나무와 물, 흙과 바위로 이루어진 단순한 유기체가 아니라 커다란 생명체이며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라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렇다. 자연에는 꽃이 피고 나뭇잎이 지는 자연현상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에는 시가 있고, 노래가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다만 조금은 숨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법정 스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한 단어는 ‘무소유’ 일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빌리자면 가난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는 길이다. 이에 비추어 봤을 때 법정 스님은 스스로의 격을 어떻게 해야 높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

우리 사회가 병들고 자연이 함께 병드는 이유는 우리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소유하려는 욕심 때문이다. 소유를 위해 자연을 개발하기 위해 오염된 환경. 그로 인해 벌어지는 세계의 이상기후와 식량난은 어쩌면 스스로 자처한 결과이다. 자연은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 듯이 주는데 자식인 인간은 감사함도 모르고 오만하게 방종하고 있다. 

 법정 스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우리가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그럼 혹자들은 물을 것이다. ‘언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이에 온자 하신 법정 스님은 아마 서슬 퍼런 음성으로 우리들을 이렇게 꾸짖을 것이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스님께선 펄쩍 뛰시겠지만 내겐 스님과 자연이 하나로 보인다. 청빈으로 절제된 아름다움을 발산하시고 욕심 없는 가운데 남을 위해 베푸시는 모습들은 자연과 다를 바가 없으시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탄력 있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연과 함께 하신 스님의 행적을 책에서 찾다 보면 어느덧 자연을 탐닉하는 나를 발견한다. 자연과 닮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스님의 담담한 산문을 읽다 보면 삶의 진리를 발견하는 느낌이다. 2만 원 남짓한 돈으로 삶의 진리를 배워가는 내 모습은 마치 경전의 진리를 도둑질해가는 구도자의 모습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롭게>를 통해 배우는 삶의 가치에 대해 곱씹고 나면 더 이상 법정 스님의 순수한 가르침을 배우지 못함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맑고 향기롭게>를 비롯한 법정 스님의 서적은 한번 읽고 꽂아두는 책이 아니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서 가슴이 답답하거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몇 번이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잔인하고 파괴적인 인간성을 버리고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성을 회복해야만 인간의 존재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스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깨우치고 되새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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