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호모 데우스
우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시대에 뒤처진 이야기가 된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기술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 시장성과 국가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체감하지 못할 뿐 대기업의 창고에는 엄청난 테크놀로지들이 숨어있다.
기술이 바뀌면 삶의 양식도 바뀌어야 한다. 법과 제도, 사회적 합의, 가치 판단의 변화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변화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하려면 인간을 알아야 한다고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를 통해 말한다.
역사학자인 하라리는 역사학,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 등의 다양한 학문으로 사피엔스의 역사를 해석한다. 역사를 통해 호모 사피엔스를 파악해야 미래의 신의 권능을 가질 호모 데우스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인조인간 만들기), 그리고 비(非) 유기체 합성. 그가 생각하는 신의 정의는 불사의 몸을 가지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세상은 엄청난 변혁을 겪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의 계급이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고 지금보다 더 고착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술을 공부하고 개발하려면 시간과 돈이 필요한데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은 현재의 부자들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의 힘은 증기와 전신 기계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하고, 이것들은 그저 식품, 섬유, 자동차, 무기를 생산하는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디킨스의 영국과 마디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더 클 것이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 21세기 진보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신성을 획득하는 반면, 뒤처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예언이다. 흙수저 출신 문과는 다 죽으라는 소리인가? 그렇다.
프레이와 오스본(옥스퍼드 대학교 연구자들)이 개발한 알고리즘은 현재 미국에 존재하는 직업의 47%가 고위험군에 속한다고 추산했다. 2033년경 텔레마케터와 보험업자들이 알고리즘에 일자리를 뺏길 확률은 99%이다. 같은 일이 스포츠 심판에게 일어날 확률은 98%, 계산원에게 일어날 확률은 97%, 요리사에게 일어날 확률은 96%이다. 웨이터는 94%이다. 물리치료사는 94%, 관광가이드는 91%, 제빵업자는 89%, 버스기사도 89%, 건설노동자는 88%, 수의자 조수는 86%, 경비원은 84%, 항해사는 83%, 바텐더는 77%, 기록관리 전문가는 76%, 목수는 72%, 인명구조요원은 67% 등이다. 물론 안전한 직업도 몇 가지 있다. 컴퓨터 알고리즘이 2033년까지 고고학자를 내쫓을 확률은 단 0.7%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자라는 직업은 매우 정교한 유형의 패턴을 인식해야 하고 수익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이나 정부가 형후 20년 내에 고고학을 자동화하기 위해 투자할 확률은 거의 없다.
과격한 사람들은 이런 사회가 온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처럼 과격한 시위를 해서라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되찾겠다고 말한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의견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역사에는 대규모 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더 잘 협력한 쪽에 승리가 돌아갔다. ...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것은 로마인들이 뇌가 더 크거나 도구 제작 기술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이 더 효과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면 훈련된 군대는 오합지졸들을 쉽게 궤멸시켰고, 단합한 엘리트층은 무질서한 대중을 지배했다. 1914년, 300만 명의 러시아 귀족, 공직자, 자본가들이 1억 8,000만 명의 농부와 노동자들 위에 군림했다. 러시아의 엘리트층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줄 알았던 반면, 1억 8,000만 명의 보통 사람들은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실제로 러시아 엘리트층이 주로 한 일은 바로 1억 8,000만 하층민들이 협력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대중들에 의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는 소수의 협력에 능한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1억 8,000만 명의 농부들이 차르에 항거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적지 적소에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공산당원은 겨우 2만 3,000명이었다.
1989년 12월 17일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물리쳤지만 루마니아의 권력은 2,000만 명의 대중에게 가지 않았다. 그들은 수적으로 우세하고 열광적이긴 했지만 스스로를 조직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결국 1917년 러시아에서처럼 권력은 소규모 정치인에게 돌아갔다. 협력하는 방법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효율적인 조직을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발 하라리가 지금까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살펴본 결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할 가까운 미래에도 그 혜택을 받는 사람은 지금의 자본가들이다. 쥐뿔도 없는 우리들은 곁에서 찌꺼기에 만족해야 한다. 물론 미래 과학기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만들던지, 미국의 파워볼에 당첨되던 지 (2017년 8월 24일 파워볼 당첨금액은 8,560억 원이었다), 기가 막힌 관련 기술자가 되던지.
다른 방법도 있다. 지식을 쌓아서 어떻게든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일이다. 인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은 경험 x 감수성이라는 공식으로 획득한다. 이 공식에 곱셈 기호를 사용한 것은 두 요소가 상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 값이 0이면, 설령 감수성이 아무리 높다 해도 우리가 얻은 지식의 총량은 0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중세 유럽은 지식= 성경 x 논리, 과학 혁명 때는 지식= 경험적 데이터 x 수학이었다.)
그러면 감수성이란 뭘 의미하는가? 첫째는 감각, 감정, 생각에 주목하는 것. 둘째는 그 감각, 감정, 생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라리는 지나가는 모든 산들바람에 흔들려서는 안 되지만 새로운 경험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그 경험들로 인해 내 견해와 행동은 물론 성격에 일어나는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 첫 페이지에 ‘Everything change’라고 자필로 적어놓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모든 것이 변하는 가운데 그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파라오를 숭배하는 것은 구시대적 산물인 것 같지만 아이폰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에어 조던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치, 경제 체제가 완벽하진 않지만 가장 나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과거 제정일치 사회나 사회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나선형’으로 돌고 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하라리는 책 마지막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이 중요하다. 현대 사회에서 안다는 것은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세 가지 질문이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한다.
역사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의미의 그물망을 짜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 그물을 곧 풀리고, 되돌아보는 우리는 그런 헛소리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천국에 가기를 바라며 십자군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처럼 들린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심지어 냉전은 더 미친 짓으로 보인다. 어째서 30년 전 사람들은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핵 대학살을 불사할 생각까지 했을까?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하나 우리의 믿음도 백 년 뒤 우리 후손들에게는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