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rk Jan 29. 2018

로튼 토마토 지수 100%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

버스나 지하철, 혹은 기차에 앉을 때마다 생각한다. “예쁜 여자가 옆에 앉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이런 기대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악을 쓰는 아이들이나 코를 골며 내 자리를 침범하는 아저씨가 안 앉으면 다행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꿈꾸는 이런 ‘영화’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 (비록 대중교통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리처드 링클레이터(Richard Linklater)는 198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장난감 가게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쿵짝이 맞은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필라델피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깊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링클레이터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비포 선라이즈>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파리로 돌아가는 여대생 셀린느(줄리 델피)와 마드리드에 유학 간 여자 친구를 만나려고 유럽에 왔다가 실연의 상처를 입은 제시(에단 호크)는 같은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 
   
마침 같은 칸에 탄 독일 부부가 큰 소리로 말다툼을 시작하고 제시는 셀린느에게 다른 칸으로 자리를 피하자고 제안한다. 그곳에서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며 서로를 알아가며 친근감을 느낀다. 하지만 곧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다. 남자의 목적지는 비엔나, 여자는 파리. 기차가 빈 서부역에 도착하자 제시는 셀린느에게 제안한다. 여기에서 내려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예기치 못한 만남, 계획에 없던 여행이었지만 셀린느는 제시의 제안을 받아들여 빈 서부역에 내리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젊은 청춘 남녀의 만남은 동트기 전(before Sunrise)까지 14시간 연장된다. 골드 1에서 플레 5로 신분상승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지만 뜨거운 청춘 남녀에겐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시간일까? 
   
이 영화는 100분이 넘는 별다른 사건 없이 배경이 되는 빈을 돌아다니며 셀린느와 제시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의 고향, 예술의 도시’인 빈 홍보영화라는 별칭을 얻는 데 성공한다.



빈의 첫 여정을 시작하는 촐암트슈테그 다리, 첫 키스를 나누는 프라터 공원의 대관람차(리젠라트), 깊은 울림의 종소리를 들으며 세대의 고통과 행복을 느꼈던 마리아 암 게슈타데 (Maria am Gestade) 성당, 돈을 받고 시를 지어주는 남자를 만나는 도나우 강 그리고 소박한 빈의 뒷골목과 젊음을 상징하는 클럽, 카페, 무명의 무덤 등등. 



그들이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상황극을 하는 카페 ‘슈페롤’은 링링(Ring Ring) 카페라고도 불리며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카페를 나와 알베르티나 미술관 발코니에서 셀린과 제시가 사랑을 나누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네 꿈속에, 넌 내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이세라의 에메랄드 꿈길을 걷듯 빈의 곳곳을 누비며 사랑, 철학, 삶, 죽음 등에 이야기하는 둘을 보면 미치도록 빈이라는 도시에 가보고 싶다. 관광객 유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외국인에게 두 유 노우 김치? 두 유 노우 강남 스타일? 을 외치는 게 아니라 그 나라가 지닌 매력과 아름다움을 잔잔히 콘텐츠를 통해 은연중에 보여주면 사람들을 취한 듯 이끌리게 돼 있다. <피아노의 숲>을 보면서 폴란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Before Sunrise>를 보면서 두 남녀가 있는 공간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그전에 나도 셀린느 같은 혹은 제시 같은 사람과 우연한 만남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겠지만) 



셀린느와 제시가 만난 그 하루, 우리가 어딘가로 떠났을 때 느끼는 그 감정, 콜드플레이 콘서트를 처음 본 그 몇 시간은 개 같은 나날을 버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두 남녀는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그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일상을 버틸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를 실제로 본 날, 처음 가보는 곳에서 맛보는 감동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날의 기억. 그래서 더 그리워지고 아련해지는 추억.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나날들을 붙드는 한편, 그런 나날들을 만들어야 한다. 



PS- 둘을 이어주는 독일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는 남편이 ‘여성 7만 명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옆에 앉은 아내에게 “너도 그중 하나야”라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이에 아내는 격분해 “당신도 알코올 중독자잖아!”라고 반박하자, 남편은 “내가 술 마시는 이유가 있지. 당신이랑 결혼했잖아!”라고 대답한다. 
   
   
PS2- 이 영화는 로튼 토마토에서 비평가 지지율 100%를 기록한 영화이다. 최근 로튼 토마토 지수를 후하게 준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 로튼 토마토는 영화의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영화가 얼마나 신선한가를 기준으로 삼긴 하지만 대단한 기록임엔 틀림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네도 3 포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