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밤은 책이다
학교에서 과제를 하다 보면 교수님의 요구와 분량의 압박으로 인해 인용을 하게 된다. 인용의 장점으로는
1- 분량이 늘어난다.
2- 있어 보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문가의 의견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3- 생각의 확장을 도와준다.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 내가 이 어려운 책을 읽었습니다’라고 은연중에 알리는 효과도 있다. 그렇게 한창 인용이 늘어나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이 아닌 남의 글을 얼기설기 엮는 편집자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인용을 최소화하고 글을 썼더니 분량이 부족한 것은 물론, 딱히 신선하지도 않았다.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언뜻 들으면 창작과 모방은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론 아주 밀접하게 붙어있다. 평생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은 탓에 시력을 잃은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도 <바벨의 도서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 어느 영원한 여행자가 아무 방향으로나 도서관을 가로질러 여행한다면, 수십 세기 후에는 동일한 책들이 동일한 무질서로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의 <밤은 책이다>는 작가가 재밌게 읽은 책을 소개하고 그에 관한 자신의 감상을 짧게 정리한 책이다. 3~4페이지 단편으로 엮은 이 책은 자기 전, 화장실 갈 때, 라면에 물 끓일 때 한두 토막씩 알맞은 분량이다. 이제껏 1만 권이 넘는 책을 샀다는 이동진 작가의 책에선 친숙한 책도, 처음 들어보는 책도 제멋대로 나온다. 철학, 역사, 소설, 수필, 천문학, 물리학, 종교 등 분야도 다양하다. 경험자를 통해 경제적으로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인용 글도 있다.
76권의 인용 도서 그리고 77개의 독후감(*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은 2번 쓰였다)으로 구성된 <밤은 책이다>을 읽고 난 후 나는 이동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참 많은 책을 읽었고 짧게나마 느낀 점을 잘 정리했구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책은 어렵다. 읽기도 어렵고 즐기기도 어렵다. 여유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남자들이 가장 책을 많이 읽는다는 군 복무 시절. 짬 좀 먹었을 때는 일주일에 4~5권의 책을 읽었는데 사회에 나오니 일주일에 한 권 읽기도 버겁다. 좋은 책을 찾기도 어렵다. 책 고르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밤은 책이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동진 작가처럼 이 책에 한 줄 평을 달자면 “책 소개 카탈로그”라고 칭하고 싶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독후감은 ‘밤의 아이, 낮의 어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을 인용하면서 독후감을 모아놓은 책 <밤은 책이다>의 독후감을 마칠까 한다.
캐나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크리스토퍼 듀드니의 책 <밤으로의 여행>은 깊은 밤이나 새벽에 읽기 좋습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글 전체가 밤에게 바치는 러브레터 같은 책이거든요. 밤과 관련된 자연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지식들을 저자의 밤에 대한 서정적인 느낌과 교직하면서 써내려간 에세이지요. 어스름한 일몰 무렵부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서서히 물러가는 새벽까지 밤을 내내 여행하는 듯한 느낌인데요, 그 중에서 도입부는 이렇습니다.
나는 밤을 사랑한다. 신비한 여름밤, 밤이 찾아올 때 느끼던 흥분, 밤의 검은 광채는 내 오랜 기억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내가 11살 되던 해의 무더운 여름밤도 기억난다. 특히 달이 환하게 빛날 때면 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난 부모님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무 계단과 현관 앞의 참나무 마룻바닥을 살금살금 기어서 집 밖으로 몰래 빠져 나가곤 했다. 등 뒤로 조용히 뒷문을 닫고 난후, 훈훈한 밤 공기 속에서 느끼던 혼자만의 달콤한 자유! 달빛 가득한 뒤뜰의 밝은 정적 속으로 발을 내딛을 때면, 전기처럼 짜릿짜릿하고 순수한 기쁨이 번개처럼 내 몸을 뚫고 지나갔다.
우리 집은 숲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난 종종 울타리를 넘어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곤 했다. 밤눈이 밝아서 달빛이 없을 때에도 나뭇가지와 마른 낙엽을 밟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난 내가 퓨마나 표범이라고 상상하면서 조용히 숲속을 거닐곤 했다. 그야말로 북아메리카의 밤하늘 아래서 자유를 만끽하는 한 마리 짐승이었다.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지만 난 밤눈을 이용하여 돌아다니며 빅토르 위고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빛나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다. 빛나는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다. 우리의 육신에 달린 눈은 오직 밤만을 본다.” 난 어둠과 숲과 밤의 동물들과 하나가 되었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내가 밤에 대해 느끼는 매혹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밤에 관한 시들을 엮어 시집을 냈고 지금도 기나긴 밤 산책을 즐긴다. 이젠 숲이 아니라 도시의 주택가들을 거닐긴 하지만....... 밤에 홀린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다. 친구의 딸인 7살 짜리 멜리사는 특별함 밤‘ 그 아이는 ’소원을 비는 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면 집 밖으로 나가 엄마에게 받은 작은 나무상자 안에 ’황혼의 희미한 빛을 담아온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낮에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있는 나의 신비한 밤을 볼 수 있어요. 상자는 아주 조금만 열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어둠이 모두 새어 나가거든요.”
저 역시 밤을 사랑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야행성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보통 새벽 네다섯 시쯤 잠이 드는데, 일어나서 신문을 읽고 나면 어느새 정오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결국 해가 지고 난 뒤의 저녁이나 밤 시간이 제게는 매일 열 시간 넘게 있는 셈이죠. 밤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그런 올빼미 생활을 버틸 수 있겠어요.
밤에 홀로 뭔가에 몰두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낮 동안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이 책에도 묘사되어 있듯, 신데렐라가 부엌데기 하녀에서 신비로운 차림의 공주로 변신하려면 밤이 되어야만 했지요. 피터 팬은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 야행성 인간이었구요. 그리고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파란 요정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말하자면 밤은 치열한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부드러운 동화가 시작하는 시간일 거예요. 괘종시계가 열두 번을 치고 나면 저마다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소년과 소녀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쓴 편지를 낮에 부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낮의 어른은 밤의 아이를 부끄러워하니까요. 하지만 밤의 아이 역시 낮의 어른을 동경하지는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