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rk Oct 28. 2017

평론가와 예술가의 관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버드맨>

처음엔 히어로물인줄 알았다. 리건 (마이클 키튼)이 가부좌를 튼 채 공중부양을 하고 있고 맘에 들지 않은 상대 배역에게 무대 장치를 떨어트려 부상을 입혀 배역 주인공을 바꾸니 말이다. 이제 막 스파이더 맨처럼 다 때려 부수고 하려나 했는데 웬걸. 리건 톰슨은 한때 ‘버드맨’으로 엄청난 성공을 한 히어로물 주인공이었으나 지금은 자신이 각색한 연극으로 대중들 앞에 서고 싶은 퇴물 배우다.


 (저 팬티는 몇 장 있는걸까.)


이혼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딸은 약물중독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대역으로 온 마이크 샤이너 (에드워드 노튼)는 통제 불능이다. 히어로치곤 일상생활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다. 그럴 때마다 실제 ‘버드맨’이 와 고대신처럼 속삭인다. '사람들은 (블록버스터처럼) 터지는 걸 원하지 (연극처럼)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것엔 관심이 없어.' ‘그냥 버드맨을 다시 찍어. 실패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언론에서 떠들 거라고? 그런 건 금방 잊혀져.’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버드맨>에서 생각해볼 거리 2가지를 꼽는다면 인간의 모순과 평론가의 의미다. 우선 인간의 모순 이야기를 해보자.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자기 스스로 행복을 정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 타인의 기준에 맞춰져야만 행복을 느낀다는 의미다. 내가 아무리 행복하다고 생각해보 타인이 ‘넌 불행해.’ ‘실패했어.’ ‘괜찮아? 너처럼 사는 건 좀 아닌 거 같아.’라고 규정하는 순간 삶은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예쁘기도 하겠지만 루이비통 핸드백을 사고, 기능이 좋긴 하겠지만 에어조던 농구화를 사는 건 타인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누구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욕구가 너무 커 자신을 잃어버리면 안 되지만 말이다.

<버드맨>의 리건 톰슨을 보자. 리건이 영화배우가 되고, 나중에 연극 배우가 되고 싶은 이유는 학창시절에 연극을 할 때 레이먼드 카버가 자신의 연극을 보고 자신의 연기를 칭찬하는 글을 냅킨에 써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냅킨을 한동안 버리지 못한다. 


샤이너의 열연(?)으로 인해 2차 프리뷰를 통해 자신보다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자 톰슨은 버럭 화를 내면서 ‘이것 내 연극이고, 내가 주인공이야.’라고 소리친다. 말을 잘듣는 배우는 아니지만 샤이너는 리건을 ‘확실한 의지와 열의를 갖고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브로드웨이 연극 평론의 전부인 타비사가 샤이너에게  "그는 쫄쫄이 새 수트를 입은 할리우드 광대야."라고 말하자  "네, 그렇죠, 하지만 그는 내일 밤 8시 연극 무대에 모든 것을 걸 거예요."라고 답하는 멋진 동료다. 



하지만 리건에게 상대 배우는 주인공인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에 불과하다. 스스로 예술을 숭고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예술은 평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연극에 표가 얼마나 팔렸는지, 언론이 연극을 어떻게 이야기 했는지를 너무도 신경 쓰는 모순적 혹은 연약한 존재다. 영화 마지막에 자신을 그토록 비난했던 타비사가 뉴욕타임즈에 '현재 연극계의 동맥에서 사라졌던 피를 흘렸다', '극사실주의 장르의 개척'이라는 엄청난 호평을 쏟아내자 어른에게 칭찬받은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것처럼 가볍게 씨익 웃는다.자신의 목표를 달성해서였을까? 결국 그는 ....... 


이번엔 평론가 얘기를 좀 해보자. 

예술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평론가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는 것 역시 평론가의 몫이다. 평생 평론가에게 외면받았던 빈센트 반 고흐와 그린버그라는 미술 평론가가 만들어준 스타 잭슨 폴록의 삶을 보면 참 대조적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모나리자를 보면서, 브랑쿠시의 조각을 보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평론가들의 담론이 없다면 아마 지금 느끼는 아우라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평론가는 작품에서 가치와 이야기를 꺼내는 산파같은 역할을 한다. (아니면 광부라고 표현해도 될 듯 싶다.)


(브랑쿠시의 <공간의 새> 이걸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할까.)

그러니까 평론가는 이쪽에서 보면 사기꾼이고 저쪽에서 보면 예술가다. 그걸 판단하는 건 얼마나 논리적으로 혼이 담긴 '구라'를 하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평경장도 예술가라고 볼 수 있겠지.) 다른 글에서 썼지만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을 평론가가 주는 상이라고 받지 않았다. 권위의 그늘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론가의 힘을 잘 보여주는 웹툰으로 이말년 시리즈의 <우상의 시대>도 있다.


(병맛같이 그려놓으면 사람들이 그럴싸한 철학을 붙여넣는 이말년 시리즈. 그래도 그의 작품이 나름 심오한 주제를 갖고 있다는 건 인정 안 할 수 없다.)

지금은 평론가의 힘이 많이 약해지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도 평론가 말 한마디에 영화 예매율이 올라가고 죽어있던 음악이 차트를 점령하는가 하면, 어처구니 없는 미술 작품이 수백억에 거래되기도 한다. 평론가를 욕해도 평론가의 맘에 들고 싶은 예술가들의 아이러니한 상황. (물론 아닌 예술가도 있겠지만) 리건 톰슨이랑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건 예술가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선임을 욕하지만 선임 마음에 들고 싶고, 상사를 욕하지만 상사 마음에 들고 싶어하는 어쩔 수 없는 권위의 힘. 그 그늘의 달콤함. 이 굴레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그 권위를 차지하거나 

버드맨은 롱테이크 기법과 그 영상 안에 들어있는 드럼 연주가 인상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좁고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리건 톰슨과 그때 영상에 입혀지는 긴박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드럼소리는 마치 <위플래쉬>를 살짝 연상시킨다.



롱테이크 기법이지만 단조롭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넘나드는 역동적인 움직임은 '모던 필름메이킹의 롱테이크 패러다임을 개척한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라라랜드에서 상큼하게 나오는 엠마 스톤이나 피터 잭슨의 <킹콩>의 여주인공 나오미 왓츠 (일부러 살을 찌운건지, 찐건지 모르겠지만)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꽃에서 김치 냄새가 난다고요!!!)
(너 나오미 왓츠였어?)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해석이 많은데 참 재밌다.   

- 마지막 장면은 리건의 상상이다. 

-리건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리건은 무대에서 총을 쏠 때 이미 죽었다. 

-리건은 옥상에서 뛰어내렸을 때 이미 죽었다. 

-리건에게는 실제로 초능력이 있었다. 

각 결말에 대해 논리적 해석들이 있는데 찾아보기 전에 스스로 생각해 평론가처럼 주석을 달아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기술의 중요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