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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Oct 28. 2017

B급 영화?

쿠엔틴 타란티노-  장고: 분노의 추적자

흔히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B급 감성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세간의 평가를 들은 후 <장고: 분노의 추격자>를 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B급 감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 더럽다  

혹은 사실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에서 침 뱉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투명한 액체가 깔끔하게 입으로부터 분리돼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장고>에서는 걸쭉한 노란색 액체와 건더기들이 길게 분비된다. 잠깐 졸았다면 토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정도다.   

또한 총에 맞아 피가 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보통 영화에서는 호스에 바늘구멍을 뚫은 것처럼 한 가닥의 피가 ‘퐁’하고 분사하기 마련인데 <장고>에선 그런 배려 없이 사방으로 피가 튄다. 둘 중 뭐가 더 사실적이냐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장고>의 출혈 장면이다. 언뜻 보면 살점까지 너덜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적인 (혹은 더러운) 장면들은 세련된 장면은 아니다. 세상이 세련됨을 A급이라고 한다면 단연 타란티노 영화의 장면은 B급이다.   

2- 거칠다.   

어떻게든 기승전결을 매끄럽게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현재의 시나리오와는 달리 <장고> 혹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의 스토리의 이음새는 투박하다. <장고> 초반부에 노예상인에게 팔려가는 장고를 닥터 킹 슐츠가 구해준다. 장고가 현상금 타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고가 왜 현상금 타깃을 알고 있는지, 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해주지 않는다. 보안관으로 위장한 범죄자를 잡을 때, 아들과 농사짓는 현상금 타깃을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영화 같으면 세밀하게 피해자의 스토리도 추가해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 혹은 비인간적인 변모를 관객에게 친절하게 알려줄 텐데 말이다. 그의 영화는 불친절하다. 

정확한 날짜, 정확한 위치도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 역시 불친절의 증거.   

(물론 시간이 흐른 뒤 장고와 현상금 타깃 3형제의 연결고리가 나오긴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난 후 설명해준다.)   

3- 폭력적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가 폭력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영화는 B급이라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나는 C급도 될라 말랑한 관객이기 때문에 별 문제는 안 된다. 

이제 영화 얘기를 해보자. 이 영화는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이자 민족 배신자를 척결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물론 친일파에 비하면 캘빈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흑인 집사 스티븐(사무엘 L 잭슨)의 배신행위는 귀여운 수준이긴 하다.   

<코치 카터>에서 사무엘 잭슨의 연기를 보고 감명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콩: 스컬 아일랜드>에서는 복수밖에 모르는 바보 패커드 중령 역을 맡았는데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라 그의 연기마저 단순했던 기억이 난다. 배우의 연기력도 중요하지만 배역도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사무엘 잭슨을 통해 알 수 있다. 



<장고>에서 그가 연기한 스티븐을 보자. 미시시피 주에서 집사로 일하는 흑인 스티븐은 질펀한 남부식 흑인 영어를 구사하는데 전라도 사투리를 듣는 것 마냥 구사하고 걸쭉하다. 힙합의 느낌보다는 판소리의 느낌이 강한 억양과 흑인임에도 흑인을 깔보는 표정과 아랫입술을 삐쭉 내민 디테일은 너무도 훌륭했다.



영롱하게 빛나던 캘빈 캔디의 연기력은 스티븐을 만나자 급격하게 작아진다. 태양이 뜨면 별을 빛을 잃는 법이다.



영화 후반부에 흑인 하녀들을 보고 흑인들은 도망치라고 말하는 장고의 말을 듣고 어물쩍 나가려는 스티븐의 연기는 웃음과 분노를 함께 자아낸다. 장고와 그의 아내 브룸힐다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감지한 직감, 같은 인종을 핍박하는 잔혹함 그리고 그런 인생으로 얻은 집사의 직위. 장고가 그에게 목숨을 구걸해보라고 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떤 개소리를 걸쭉한 리듬에 맞춰 뽑아냈을지.   


이 영화는 노예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지도, 인종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런 요소가 아예 없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그런 영화로 치부하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그런데 재밌고 통쾌하다.   

19세기 중반 남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R&B와 힙합이 OST로 쓰였으나 전혀 어색하지 않다. 처음 음악이 나올 때 ‘뭐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너무 잘 어우러진다. 




19세기 배경과 현대 음악의 조합은 자칫하면 김치 칵테일처럼 어처구니없는 혼종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쿠엔틴 타란티노는 김치피자탕수육을 관객에게 대접했다. 이제 방한하는 스타들에게 한국인도 밥 없이 안 먹는 김치를 한 움큼 먹이지 말고 김치피자탕수육을 먹여보자. 한식의 세계화로 김치 칵테일 같은 개 짓거리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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