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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Oct 29. 2017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

로만 폴란스키 <피아니스트>

사회가 더러울수록 예술은 잘 된다. 그래서 한국은 예술하기 좋은 나라다.   


故 백남준 작가의 명언으로 기억하고 있는 문장이다. 물이 더러울수록 연꽃이 아름답게 피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더러운 시기는 언제였을까? 인간의 추악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정의와 인권은 모습을 감춘 암흑시대. 아마 세계 대전이 펼쳐진 20세기 초중반일 것이다. 이 더러운 현실을 배경을 한 문학은 모두 예술이 됐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문학,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세계인을 울린 <안내의 일기>


이런 문학들은 훗날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한 기자에게 커다란 인문학적 상상력을 선물한다. 간장 두 종지를 통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는 기가 막힌 인문학 내공을 발휘한 그를 보면 문학적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쉰들러 리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녀> <인생은 아름다워> 그리고 <피아니스트>까지 추악한 사실을 고발한, 암흑 속에서 의인을 소개하는 영화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양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영화는 너무도 쉽게 관객의 분노를 자아낼 수 있다. 비인격적인 처우를 받는 유대인을 자세히 묘사하는 방법,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방법, 선량한 시민의 고통 등을 길게 끌고 가는 것이다. 관객들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 말이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그러지 않는다. 주인공인 스필만이 가족과 헤어질 때 잠깐 눈물 흘리는 장면을 제외하곤 (그 장면마저 호흡이 길지 않다) 관객의 감정을 터뜨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이유도 모른 채 총에 맞을 때도,



가족과 헤어질 때도 호흡은 길지 않다.



그게 당시 유대인의 삶이었다. 슬퍼할 수도, 분노할 수도 없는 나약함, 동료는 죽었지만 난 살아가야 하기에 포기한 묵념과 추모. 빠르게 지나가는 죽음의 장면은 언뜻 보면 우리에게 시각적 공포를 주지 않지만, 잠깐 생각해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를 선사한다. 이웃이 채찍에 맞아도, 친구가 죽어도 그저 앞만 보고 가야 한다.



언제나 죽음이 곁에 있는 공포는 분노할 틈도, 슬퍼할 틈도 주지 않는다


(슬퍼할 시간은 독일군이 없을 때 뿐이다. 그것도 잠시)


슈필만의 이름을 팔아 모금 활동한 돈을 들고 튄 안텍(앤드류 티어넌)의 소식에도 슬퍼할 만큼의 체력도 없는 피아니스트.


(이런 300의 꼽추 같은 녀석)
(실제로 같은 배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이 장면이다. 회반죽 색의 건물들은 철근을 그대로 드러낸 공간. 잔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땅으로 피신한 유대인 피아니스트. 양쪽으로 나 있는 폭격 맞은 건물은 그 자체가 공포고 절망이다. 세상에 어떤 암울한 단어도 저곳에 서 있는 유대인의 처절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흉측한 건물, 끝없이 이어진 지저분한 길, 슬픈 하늘. 죽음의 땅에 난파당한 연약한 생명체 그곳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언뜻 보면 겨울의 설산의 느낌을 주는 그 풍경은 스산하고 쓸쓸했다. 그 풍경은 한 인간을 삼켜버린다. 

그곳에 버려진 너무도 약한 존재. 고독, 슬픔, 처절함, 허망함 속에서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비루한 삶.  

그 잔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스필만의 피아노 선율. 





(쇼팽의 발라드 1번 G마이너. 1836년에 완성된 곡으로 쇼팽의 열정과 애국심이 부각된 음악이라고.

자서전에 밝히길 실제로는 쇼팽의 녹턴 20번을 연주했다고 한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제곡 격인 음악이다.) 



(녹턴과 트페가 렙 6되면 항상 알려주자)


우리나라도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생활을 했던 역사 때문에 나치의 만행에 대한 고통을 이해하는 민족 중 하나다. 그래서 <피아니스트>에서 나온 많은 인간군상에 대해 관심이 간다. 우리나라는 아직 일제의 잔재를 벗지 못한 나라기 때문이다.  

슈필만과 같은 폴란드 유대인 이츠학. 그는 독일군과 싸우기보다는 독일군 밑에서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슈필만의 동생은 "동포를 때려잡는 독일 놈 앞잡이?"라고 직접적으로 비난한다. 슈필만은 함께 유태인 경찰이 되자는 이츠학의 제안을 거절한다. 작은 실랑이 가운데 이츠학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

어디론가 끌려가는 유대인들. 많은 유대인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무력감에 빠져 독일군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유대인을 보고 한 유대인 할아버지는 분노한다. 이에 다른 유대인은 '그저 일이나 시키는 거겠지'라며 이 분노하는 할아버지도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하진 않는다.

나이가 많아서였을까 남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동조해주지 않아서였을까. 행동하지 않는 이 남자의 분노는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을까. 


“우리는 60만이야. 싸우다가 죽으면 명예나 있지.”


폐허 속에서  숨어 지내던 슈필만은 통조림을 발견해 갖은 수를 동원해 열던 중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된다. 



다행히 그 독일군 장교는 슈필만을 죽이지 않는다. 슈필만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자신의 자신의 제복까지 준다.

(독일 제복을 입어서 죽을 뻔하긴 했지만)


영화 끝에선 독일군 장교 이름을 알려준다. 빌헬름 호젠펠트. 



독일 패망 이후 소련군의 포로가 된 호젠펠트. 그의 소식을 동료에게 들은 슈필만은 그를 돕고 싶었지만 소련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독일군 장교는 1952년 죽었다고 한다. 

빌헬름 호젠펠트. 그는 나치의 장교였긴 했지만 평소에도 유태인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위였던 그는 폴라든 의 무고한 사람들과 유대인을 탈출시켜 준 것으로 유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 호젠펠트에게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를 적용할 수 있을까? 


(누구든 유대인 600만 명을학살한 아이히만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는 한나 아렌트)


어떻게 생각하면 자신이 살린 유대인보다 죽인 유대인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는 빌헬름 호젠펠트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일본의 잔재가 사회 곳곳에 남아있고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현재까지도 이런 논쟁들이 잊을만하면 올라온다. 어려운 문제다. 


1961년 4월 11일과 12월 15일 텔아비브 공개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은 아이히만. 1962년 5월 31일 이런 유언을 남기며 생을 마감했다.


"나는 전쟁 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준비되었다."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입니다. 나는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며 죽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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