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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Oct 29. 2017

고혹적인 그녀

토드 헤인스-캐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캐롤의 여주인공 캐롤 에어드(케이트 블란쳇)를 보고 고혹적이란 단어가 너무도 어울린다고 했다. 고혹. 한자로는 蠱惑인데 이 고자가 독, 악한 기운을 의미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캐롤을 고혹적이라고 표현했는지 알 수 있다.


(캐논 카메라를 사주는 연상의 재력 역시 고혹적이다)


품격 있고 귀족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캐롤과 백화점에서 일하는 테레즈 벨리벳의 관계가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백화점에서 일을 하던 테레즈의 눈에 캐롤이 맺힌다. 그녀가 값비싼 밍크코트를 입고 있어서였는지, 고상한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테레즈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에 품고 캐롤의 제안을 단 하나도 거부하지 않는다.



두어 번 만났을 뿐인데 캐롤의 집에 가고, 캐롤을 자신의 집으로 부르고, 함께 여행을 가자는 제안도 뿌리치지 않는다. 오히려 웃으며 함께 가겠다고 말하는 테레즈. 그녀는 어린 만큼 즉흥적이고 감정을 속이지 않는다.   


반면 캐롤을 보면 짬을 무시 못 한다는 생각이 든다. 테레즈와 대화 후 계획적으로 장갑을 놓고 가는 기술. 빠르긴 하지만 천천히 단계를 밟아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여성이 아니라 테레즈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동성인 캐롤을 흠모하는 상황에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는 앞서 밝혔던 것처럼 캐롤이 정말 고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후반, 그토록 사랑하는 딸의 양육권을 포기하면서까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캐롤의 모습에선 젊은 테레즈의 영혼이 보인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산다면 그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캐롤의 감성적인 모습은 테레즈와 닮아있다. 연인은 닮기 마련이다.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레즈비언인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당시 남자 친구도 있었고, 그 남자 친구는 테레즈에게 청혼과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상태다. 뜨뜻미지근하지만 태도를 보이며 애매한 답변만 하지만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진 않는다. 그러다 캐롤을 보고 ‘심쿵’하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눈을 뜬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미국.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되던 시대에 테레즈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놀라워하지 않는다. 당시 사회 분위기라면 자책할 법도, 고뇌할 법도 한데 말이다. 점심 메뉴도 고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그녀지만 캐롤의 마력은 그런 고뇌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캐롤이 없었다면 평생 자신이 레즈비언인 줄 모르고 살았을 테레즈는 캐롤을 처음 봤을 때의 감정, 뉴욕 타임스에서 일한다는 남자에게 당한 키스를 통해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는다.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캐롤을 사랑한다는 것을. 


동성애자의 촉이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매력에 자신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캐롤이 테레즈에게 콕 집어 접근한 것은 참 놀랍다. 이것도 짬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테레즈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대단한 촉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래서 캐롤은 고혹적이다. 그녀가 그토록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테레즈의 눈물은 해석하기 어렵다.



이 영화에는 두 주인공이 창문을 두고 밖을 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창문은 보통 장애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장애물과는 다르게 외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어 능동적인 대처가 가능하다.



또 미묘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거울의 역할까지 겸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창문은 테레즈가 친구와 함께 탄 차창이다.



캐롤에게 이별의 통보를 받은 후 테레즈는 뉴욕 타임스에 입사한다. 시간이 지나자 테레즈를 잊지 못한 캐롤이 옛 연인에게 카페에서 만나자고 쪽지를 보낸다. 고민하던 테레즈는 결국 카페에서 만난다. 근황을 묻는 몇 마디 말이 끝나자 캐롤은 테레즈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한다. 대답하지 않고 있던 테레즈의 뒤로 그녀의 친구가 나타난다. 테레즈의 친구가 테레즈를 발견해 함께 파티에 가자고 권하고 캐롤의 제안에 대답하지 않자 캐롤이 먼저 자리를 뜨고 테레즈도 파티에 가려고 일어난다.   


 친구들로 꽉 차 있는 차 안에서 창가에 앉은 테레즈는 아쉬운 표정으로 창밖을 본다. 창밖에는 캐롤이 있다. 그리고 슬며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여기서 자신의 아쉬운 표정을 봤을 것이다. 캐롤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자신, 레즈비언으로서 캐롤을 사랑하는 자신, 원치 않은 파티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보면서 테레즈는 결정의 순간이 왔음을 느낀다. 


 이 영화는 미국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이라는 레즈비언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캐롤 역을 맡은 케이트 블랜칫은 퍼트리샤의 팬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 출연하기를 고대했다고 한다. 워작이 테레즈의 시선으로 서술돼 캐롤이라는 캐릭터를 입체화하기 위해 50년대 레즈비언 소설들을 읽고 참고했다고 한다.

<캐롤>에서 캐롤의 우아함과 고풍스러움이 이해가 되는 일화다. 머리를 만지는 동작, 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는 움직임, 눈빛과 침묵의 풍부함은 영화를 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기차에서 캐롤과 헤어진 슬픔에 콧물까지 흘리며 열연하는 루니 마라의 열연 역시 훌륭하다. (몸매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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