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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Oct 29. 2017

중국인들이 영어를 왜 이렇게 잘하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마지막 황제


(메인 OST를 들으며 리뷰를 읽으면 황제까진 아니고 중국의 고관대작이 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중국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자금성의 웅장함.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에 대한 연민이 적절히 섞인 <마지막 황제>는 198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미술상, 의상상, 음악상을 포함해 총 9개의 상을 수상했다. 



<마지막 황제>는 당시 중국 정부가 자금성을 촬영 장소로 허락하면서 압도적인 비주얼을 선사할 수 있었다. 자금성의 규모와 미를 살린 이 영화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또한 푸이가 황제로 등극할 때의 모습을 보면 이 영화가 의상상을 수상한 이유를 알 게 된다.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푸이의 푸이의 삶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푸이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을 읽고 마지막 황제의 삶에 매료된 그는 스크린을 통해 그의 삶을 그려낸다.



3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푸이의 외로움, 망국의 황제의 무기력함, 만인 재상의 자존심, 시대에 굴복하는 모습 등을 서정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베르톨루치는 “저명한 시인이자 영화인인 장 콕토는 <마지막 황제> 서문에서 ‘나는 언제나 역사보다 신화를 좋아했다. 역사는 흔히 거짓으로 둔갑하는 진실로 구성되어 있으나 신화는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황제>에서도 신화를 무시할 수 없다는 나는 단언한다.”   


뭐 대충 해석하면 대놓고 왜곡, 혹은 각색을 하겠다는 것인데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만든 창작물을 볼 때 해당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나라는 역사왜곡에 진절머리 날정도로 당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베르톨루치의 각색은 푸이에 대한 시선을 연민 어리게 만든다. 청년기의 어머니와 떨어져 혼자 지내고 어머니처럼 모시던 유모를 쫓아 보내는 장면, 자금성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던 청년시절, 제멋대로 떠나는 두 번째 아내, 만주국에서 일본의 허수아비 황제로서의 무기력한 모습, 자신의 씨앗은 아니지만 일본군이 황후가 낳은 자식을 죽이고 일본이 패망하자 감옥에 수감되기 전에 자살 시도하는 모습, 자살을 실패하고 감옥에서 죄수의 삶, (푸이의 자서전의 영문판은 <황제에서 시민으로(From Emperor to Citizen>) 복역이 끝나고 정원사로 살아가다가 자신이 살았던 자금성을 바라보며 추억하는 모습을 보면 망국의 황제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세부적인 설정은 역사와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청나라 말기의 모습과 황제의 개인사를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은 영화가 주는 장점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인자한 모습으로 “나는 중국의 황제였단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울음을 강요한다.   


<마지막 황제>를 위해 자금성을 빌려주었던 중국 정부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역사왜곡이 심하다는 이유로 일반 상영을 하지 않았다. 굵직굵직한 사실 왜곡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영화는 부의가 3살 때 자금성으로 들어가 피붙이 없이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부의의 생부 순천왕(재풍)이 수렴청정을 하면서 부의를 키웠다. 푸이를 3살 때 황제로 등극하게 한 사람은 중국 3대 악녀 중 한 명인 서태후다. 서태후는 푸이를 내세운 후 자신이 수렴청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급사했기 때문이다. 



푸이의 비였던 문수는 영화에서처럼 부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비 오는 날에 떠난 것이 아니라 부의의 손에 의해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 각색은 <Rain>이라는 명곡을 탄생시켰다.)




푸이는 일본을 두 차례 방문해 일본 천황을 ‘어버이’처럼 여겼는데 이런 사실이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매국 행위는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푸이는 폭정을 일삼는 극악무도한 황제는 아니었지만(그럴 권력도 없었지만) 일본 패망 후 나라를 망치고 팔아먹은 전범의 신분이었다. 황후 완룽(婉容·완용)이 기모노를 입고 나타나도 탓하지 않았고 천장절(일왕의 생일)이 되면 기념식에 참석해 ‘천황 만세’를 부른 사실은 황제의 친일 성격을 잘 보여준다.



황후 완룽은 실제로는 일본 군관과 관계해 사생아를 낳았다. 이 사실을 안 푸이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 버렸다. (영화에서는 이 아이는 황제처럼 만주인이라고 하고 황제도 황태자가 태어났다고 발표한다. 물론 정통성을 염려한 일본군이 주사를 놔 죽이지만)  


부의는 출소 후 다시 결혼해 부인과 함께 가정을 꾸렸고,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냈다. 정원사로 지낸 것은 잠시일 뿐, 공산당에 입적하기도 했다.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마지막 황제>를 보면 베르톨루치가 푸이의 삶을 얼마나 감동적이게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나름의 고증도 존재한다.   


서태후는 3살 난 푸이를 만나자마자 죽어버리는데 실제로 푸이 전에 황제였던 광서제가 죽은 지 하루 만에 급사한다고 기록에 나온다. 푸이의 외로움을 부각하고자 만든 설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서태후가 죽을 때 환관들이 입에 진주를 넣는데 실제로 죽은 사람 입에 구슬을 넣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물론 진주는 아니고 야명주라고 해서 스스로 빛을 내는 구슬인데 이를 입에 물고 매장됐다고 한다. (훗날 중화민국 군벌에 의해 서태후의 묘가 도굴되는데 도굴하던 군인들이 야명주를 가져가지 위해 시체에 칼질을 하고 훼손된 시체를 방치했다.)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고증은 자금성 아니겠는가. 자금성 관련 다큐멘터리나 실제로 자금성을 가지 않는 이상 <마지막 황제>에서 만큼 자금성의 규모와 화려함을 보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아 참고로 푸이는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고 한다. 1942년 3월 23일 만주국 소재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할 때, 만주국 황제 푸이가 우등상과 함께 금으로 된 시계를 하사했다. 그냥 그렇다고.



푸이가 황제로 즉위할 때 지루하다고 징징댄다. 3살짜리 아이에게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그때 생부 재풍이 푸이를 달랜다. “곧 끝나요.” 이 말은 “청나라가 곧 망한다.”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다. (중문과 친구에 의하면 ‘끝난다’는 wan으로 발음하고 ‘망한다’ wang이라고 발음한다.) 그의 말대로 그의 제위는 오래가지 못 하였고 개인사도 아름답지 못했다. 훗날 중국 정부는 그를 손제(遜帝)라고 명한다. 겸손할 혹은 사양할 손(遜) 자를 쓴 것이다. 망국 황제의 말로지만 우리도 비슷한 황제를 가진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씁쓸한 맛이 입가에서 느껴진다.




PS-  실제로 들어보면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다. 

即将结束 곧 끝나요.

江山即亡 청나라가 곧 망한다.  


어렸을 때 앙큼한 황제의앙큼한 모습이 참 부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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