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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Oct 29. 2017

실화인 듯 실화 아닌 실화 같은 영화

벤 에플렉-아르고

싱겁게 먹는 게 건강에 좋다지만 확실히 맛은 덜하다. 게다가 짜고 매운 부대찌개를 기대했는데 맹탕일 경우 분노가 일기도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공포 영화를 봤는데 너무 뻔한 전개로 지루할 때, 숨 막히는 추격전을 기대했는데 남녀 주인공이 쓸데없이 러브 라인에 빠져 정신 못 차릴 때, 블록버스터서 영화에서 허접한 CG가 떡칠돼 있을 때 우리는 퀴블러로스가 정의한 죽음의 5단계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맛이 슴슴할 가능성이 적다. 우선 매력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영화로 제작하는 것일 테니까 재료가 자극적이다. 거기다가 연출이나 음악, 조금의 각색을 주면서 훨씬 자극적으로 끓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건강식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이건 워낙 재료가 훌륭하다든지 아니면 이 실화를 모두가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말이다.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상을 받은 <아르고>는 내 맛도 네 맛도 아닌 묘한 맛을 내는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 영화가 그럼 건강식으로 차려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실제 이야기와 영화가 그려낸 사건의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짭짤한 맛이 나야되는데 보다 보면 그 맛도 약하다. 




<레 미제라블>, <아무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제치고 최우수상을 받은 <아르고>는 1979년 이란의 테헤란 시민들이 미국에 대한 분노로 미 대사관을 점령하면서 시작된다.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이란의 마지막 군주로 1941년부터 1979년 2월 11일까지 재위했다. 이란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이슬람 율법을 세속화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슬림의 비판을 받게 된다. 말년엔 폭압정치와 부정부패로 시민들의 잦은 시위로 정권이 흔들리게 된다. 1979년 암 치료를 위해 황후와 미국으로 간 사실을 알고 시민들은 팔레비의 본국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도적인 이유로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이란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게 된다.



미국 대사관 직원 중 6명은 운 좋게 도망쳐 캐나다 대사관으로 몸을 피했지만 점령군이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알았고 6명의 얼굴을 알기 위해 파쇄된 종이를 맞추기 시작한다.  



이런 사실을 안 미국 정부는 억류된 50여 명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캐나다 대사관으로 도망친 6명의 탈출 계획을 준비한다. 이를 위해 CIA 구출 전문 요원 토니 멘데스(벤 에플렉)가 투입된다. 그는 아들과 통화에서 힌트를 얻어 SF 영화를 찍는 척하면서 캐나다 대사관에 있는 6명을 구출하기로 한다. 사막 지형인 이란이 세기말적 SF 영화를 찍는데 어울리기 때문이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 할리우드 특수 분장 전문가와 제작자를 포섭해 가짜 영화사를 차린다. 그리고 기자 회견을 열고 배우 포섭, 대본 리딩까지 한다. 가짜 영화의 제목은 <아르고>

계획 전날 델타 포스가 개입돼 군사력을 개입하려고 했지만 토니는 ‘아르고’ 작전을 감행하고 미국 정부는 토니의 작전을 돕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결국 6명은 무사히 미국으로 피신하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미국 대사관 직원도 풀려난다는 이야기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다. 역사적 사건, 미국인의 억류, 탈출 계획, 긴장감, 탈출 성공. 게다가 실화라니. 그러나 이 영화는 생각만큼 긴장감이 있지 않다. 긴장감이 없으니 탈출을 성공했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도 잔잔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탈출 영화가 이 정도 긴장감밖에 없다니. 어쩌면 이 영화는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는데 집중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다. 실제 사건과 <아르고>는 다른 점이 꽤 많다. 극 중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겨우겨우 예매한다던가, 영화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해 시장에 간다는 설정은 사실이 아니지만 괜찮다.   


공항에서 정체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는 상황들 역시 모두 픽션. 실제로는 별 일 없이 통과했다고. 이런 연출도 나쁘지 않다. 물론 원하는 만큼의 긴장감을 주진 못했지만. (이륙 직전 경비대가 자동차로 쫓아오는 장면도 연출)   


어처구니없는 건 다른 왜곡이다.   


영화에선 영국과 뉴질랜드 대사관이 탈출한 대사관 직원을 돕지 않았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캐나다와 함께 도와줬다고 한다. 탈출한 6명은 처음에 영국 대사관에 있다가 캐나다 대사관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 그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한 뉴질랜드 대사관은 캐나다 대사관이 위험해지면 그들을 숨길 장소를 따로 마련했고 탈출할 때 공항까지 대사관 직원을 데려다줬다고 한다. 



그러면서 실제 영화에서는 CIA의 공로인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당시 영국과 뉴질랜드 대사관은 얼마나 억울했겠나.   


사건 당시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영화는 훌륭했지만, 실제 작전 아이디어 및 실행에서 캐나다의 비중은 90% 이상이다. 진짜 영웅은 벤 에플랙이 연기한 CIA 요원이 아니라 전체 작전을 지휘한 캐나다 대사 켄 테일러였다.”라고 밝혔다. 



미국 영화의 특징을 (성조기가 휘날린다. 남녀가 갑자기 키스를 한다, 미국의 위대함을 직간접적으로 알린다 등) 위해 적절한 연출이나 각색은 괜찮지만 실제 도움을 줬던 사람을 비난하는 건 좀 불편했다. (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 그럴 거면 아싸리 기가 막히게 스릴감 넘치게 만들던가.   


이 영화를 보면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이 성난 이란 민중들에게 점령당했을 때 미국 시민의 분노를 잠시 묘사한다. 미국의 미디어 이용 기술이 뛰어나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미국 시민들의 분노는 참 인간적이다. 나와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을 위해 힘차게 분노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는 현대에서 저런 분노는 필요하다. 대낮에 행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도도하게 스마트 폰을 보면서 제갈 길을 가는 삭막한 세상에서 적당한 관심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옛날에 소개팅을 했던 여성분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온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그분이 말했다. “한국은 오히려 이렇게 작은 게 강점이에요. 미국은 너무 커서 시민들이 하나로 화합하지 못해요. 사람도 많고 땅도 넓고 인종도 다양하고. 그런데 한국은 작아서 하나로 응집할 수 있잖아요. 결속력이라는 게 되게 중요하거든요. 사회나 경제 모든 곳에서.” 그 말을 들은 내가 질문했다. “한국에는 몇 년 정도 계셨어요?” “들어온 지 3~4년 됐어요.” “그러시구나.” 그리고 시켜놨던 칵테일을 홀짝였다.   


철저한 개인주의에서 정작 모이는 사람은 학연 지연 혈연을 기준으로 응집하고, 정치적인 이슈로 응집하는 이 요상한 나라를 3~4년 이면 피부로 못 느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촛불 시위를 보면 응집력은 있는 게 분명한데 이 응집력이 사회 곳곳에 유대감과 결속력으로 발현되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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