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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Nov 05. 2017

예술.... 넘나 어려운 것?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철학을 등에 업은 현대 미술까지 장구한 미술의 역사를 기록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는 내내 눈의 호강은 물론 개인적인 지적 허영심까지 채워준 고마운 도서다. 장대한 정보를 담은 책에서 하나의 작품이나 한명의 작가를 선택해 이야기 하는 것도 의미 있는 독후활동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좀 더 크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하고 싶다. 왜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것일까?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만들어진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약 30,000년 전 ~ 25,000년 전 사이로 본다면 인간은 (네안데르탈인부터) 3만년 동안 예술 활동을 한 셈이다. 3만년 동안 수많은 인종과 국가가 흥망성쇠를 겪었음에도 예술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술의 가치는 계속해서 높아져 2012년 5월 8일에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1961년 작 <Orange, Red, Yellow>가 987억 원에 낙찰됐을 정도다. 가격을 듣고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냥 캔버스에 주황, 빨강, 노랑을 칠한 그림이 1000억에 가까운 가격을 받고 팔리는 걸 보면 ‘부자들의 돈지랄’이라며 한바탕 욕을 퍼부을 것이다.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 현대 미술의 걸작이라며 칭송받고 상상도 못할 금액에 낙찰되는 상황을 보면 충분히 납득되는 반응이다. 


반 가른 소의 시체, 한바탕 섹스가 이뤄진 후의 침대의 모양이 갤러리에 예술이라고 전시되는 걸 보고 있으면 과연 예술이 무엇이고 예술이 우리 삶에 필요한가란 의문이 솟구친다. 특히 지금처럼 취업만을 위해 공부하고 내 집 마련과 부의 축적이 성공의 바로미터가 된 지금 예술은 부자들의 고상한 취미이자 돈 꽤나 만지는 사람들의 재테크 수단, 즉 그들만의 리그 정도로 보는 것이 사실이다. 

혹은 인간은 과시욕과 모방 본능에 따라 오히려 값비싼 재화를 선호하기도 한다는 ‘베블런 효과’ 정도로 예술을 평하기도 한다.  (베블런 효과=가격이 올라갈수록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 

사실 플라톤도 예술을 폄하하던 철학가 중 한명이었다. 자연 모방을 의미하는 미메시스(mimēsis)를 플라톤 입장에선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플라톤은 현실 세계의 꽃은 꽃의 이데아의 복제품이고, 꽃을 그린 그림은 이데아의 복제품의 복제품인 셈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주는 카타르시스(정화, 배설을 의미)를 강조하며 예술을 옹호했다. 예술을 보면서 두려움과 연민 등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되고, 종국엔 카타르시스를 통해 감정을 해소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 어머니들이 아침드라마를 보면서 감정이 이입돼 악역을 욕하고 착한 주인공을 안타까워하면서 눈물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끼시는 것이다. 죽기 전에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고 싶다던 할머니,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눈물 흘리는 관람객 역시 예술이 주는 아우라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카타르시스에 의한 감정의 해소, 즉 행복을 느낀다. 그렇다. 예술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도 자신의 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위대한 예술은 ‘감동’을 전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돌아보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예술은 깃들어있다. 머그잔이나 핸드폰 케이스에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고흐의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다. 서울시민이라면 한번 쯤 들려봤을 법 한 동대문 DDP는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작품’이다. 철강기업 포스코 사옥 앞에서 만날 수 있는 구조물 <아마벨>은 미국의 화가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이다. 2014년 석촌 호수에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대형 고무 오리인 <러버덕>이 전시된다고 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당시 엄청난 인파가 몰릴 것임은 자명했다. 심지어 제2 롯데월드의 안전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러버덕>이 석촌 호수에 등장하자 6일 만에 약 72만 명이 몰렸고 한 달 간 약 440만 명이 석촌 호수를 찾았다고 한다. <러버덕> 작가인 호프만은 "러버덕 프로젝트에는 국경도 경계도 없다.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으며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없다. 러버덕엔 치유의 속성이 있다. 물 위에 다정하게 떠있는 오리를 보면 저절로 치유되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러버덕 프로젝트를 통해 전 세계의 긴장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언급했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러버덕>을 통해 유쾌함이나 동심을 느꼈고 한국의 집단적인 상실감을 위로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4,840억 원짜리 애물단지가 되는 것 아니냐는 동대문 DDP 역시 많은 관람객과 방문객을 끌어들였으며 미국 뉴욕타임즈는 동대문 DDP를 꼭 가봐야 할 세계 명소 52곳 중 하나로 추천하기도 했다. 

예술이 자본과 떨어질 수 없는 노릇이지만 결국 예술이 자본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대중들은 예술을 향유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럽을 최고의 여행지로 꼽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럽에서 숨 쉬고 있는 미술작품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유럽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명작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가 유럽 여행을 인생의 버킷리스트처럼 혹은 짝사랑하는 대상처럼 소중하게 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했기에 세상은 다양한 개성을 품을 수 있었고 그로인해 발전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에게 예술이 없었다면 사회는 회색빛으로 점철됐을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의 첫 문장처럼, ‘겨우 34층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회식 빌딩’들이 늘어선 삭막한 세상 말이다.    

곰브리치는 담담한 어조로 서양 미술사(史)라는 무한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곰브리치의 친절하고도 애정어린 설명과 함께 산보하듯 미술사 여정을 마치면 우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는 느낀다. 


우리는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견디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다. 누군가는 연애, 결혼, 출산을, 누군가는 거기에 더해 취미와 인간관계를, 심지어 어떤 사람은 여기에 더해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다. 사회는 이들을 두고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라 부른다. 너무도 힘든 세상이라 예술을 더욱 멀리할지도 모른다. 예술이 밥 먹여 주냐며 자격증, 학점, 토익에 힘을 쏟을지 모른다. 하지만 잊지 말자. 노숙자들 프라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인생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적이다.”고 헤르만 헤세가 말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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