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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Nov 05. 2017

나는 누구인가??

조너선 화이트- 바른 마음

이 독후감이 이렇게 긴 이유에 대해 변명하자면 공모전에서 원하던 최소 페이지가 10p였기 때문이다. 분당에 회사에서 했던 공모전에서 1차 합격해서 무슨 크리스탈로 만든 상패 비스무리한 것도 받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뷔페도 먹었었는데 그 회사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는건 뷔페가 맛있었다는 점, 그리고 회사에 걸려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정도? 


 아마 사측에서 원한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 였던걸로 기억한다. 



 10장임에도 불구하고 올리는 이유는 상당히 고생하면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바른 마음을 제외하고도 많은 책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했었다. (그래서 고생이 많았다. 문송한 주제에 이공계 지식을 읽다보니)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좀 더 확장시킨다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란 질문으로 치환이 가능하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한 상투적인 답은 상당히 많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이성적이다 등등.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합리적 인간(경제적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무리를 이루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사회적 동물) 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나보다 힘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짓밟기도 하고(이기적 존재) 토론장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반론하며 내 의견을 전개해 나간다.(이성적 존재) 

이뿐인가? 우리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기도 하는가 하면 인터넷 게시판에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달기도 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인간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뇌신경학 등 많은 분야에서 인간을 분석했고 나름의 답을 내놓은 상태다. 경제학에선 인간을 어떻게 정의 내렸을까?  


경제학자들은 흔히들 (심지어 우리도)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라고 한다.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려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한다고 말이다. 과연 우린 경제적, 합리적 동물일까?   


외국에 사는 큰삼촌이 오랜만에 한국에 오셨다. 저녁을 먹고 단란한 시간을 보내다 문득 삼촌의 손이 지갑 쪽으로 간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나에게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만원을 너의 하나뿐인 동생과 싸우지 말고 나눠가져야 한다.” 이어 불안하셨는지 조건을 거신다. “만원 중 동생에게 얼마를 떼어주던 그건 너의 자유다. 동생이 네가 떼어준 돈을 받는다면 상관없지만 동생이 네가 떼어준 몫을 거부한다면 만원을 다시 가져가겠다.” 

여기서 우리가 만원을 받은 입장이라면 얼마는 떼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할까? 

우리가 경제적 동물이라면 최대한 적은 금액을 주는 것이 합당하다. ‘나’는 만원에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남겨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동생의 경우에도 없는 것 보단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10원일지라도) 받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 10원을 준다면 금액을 거부할 것이다. 실제로 동생의 입장에선 응답자는 약 4,000원 정도는 받아야 거부하지 않고 돈을 나눠 갖는다고 대답했다. 형의 입장에 선 응답자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4,000원과 그다지 차이 나지 않는 금액인 약 3,800원을 동생에게 주겠다고 응답했다. 형과 동생의 입장에 선 모두 합리적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형의 입장에선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가장 커야하고, 동생의 입장에선 단 1원이라도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 편이 이득이고 합리적 행동이다. 그러나 형과 동생 모두 절반은 아니지만 절반에 가까운 금액인 약 4,000원을 나눠 갖는다고 대답했다.   


아담 스미스로 대변되는 경제학 논리(보이지 않는 손)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공리주의로 세상은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고 누구도 이 논리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미국에서 노르웨이 이민자로 태어나 가난한 농가에서 성장한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달랐다. 그는 19세기 말에 당대 주류 경제학 모델을 비판하는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을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상품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증가한다는 기존 경제학의 수요법칙과 달리 인간은 과시욕과 모방 본능에 따라 오히려 값비싼 재화를 선호하기도 한다는 ‘베블런 효과’를 제시했다. (베블런 효과=가격이 올라갈수록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 

이는 기존 경제학의 가정에 치명타였다. ‘베블런 효과’는 소비자의 지출이 합리적 계산에 의거한 것이라는 (신고전파)경제학 논리를 무너뜨리는 이론이었다. 더불어 인간은 과연 합리적 존재인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다.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이고 경제적이면서 비합리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이중적인 인간)라고 해야 옳다.  

 

경제학적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분석하는데 적합한 학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분야에 기대야 할까?   

많은 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연구했고 소크라테스부터 이어진 이성 중심의 인간관을 시작으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이론'을 넘어 칸트를 위시한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이성으로 인간을 해석하는데 많은 한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이성 중심적 해석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철학자는 영국 출신 철학자 흄이다. 

흄은 그의 첫 번째 걸작 《인간 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써낼 때 ‘도덕학’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인간 본성이 어떤지 우선 그 실상부터 알아내는 것이었다. 역사, 정치 문제, 동료 철학자를 대상으로 인간 본성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우리의 도덕적 삶은 주로 ‘감성’(직관)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반해 편견이 가득하고 무력한 이성적 추론 능력은 감성의 하인 역할에 딱 맞았다. 또한 흄은 공감 능력을 중시했다. 흄은 자신의 저서에 ‘나는 인간의 본성에 공감의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의 감정이란 대개 거기에서 거기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즉 흄은 이성이 열정의 하인이고, 또 하인이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심리학 박사 조너선 화이트는 흄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가벼운 아쉬움을 나타낸다. “흄은 인간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설계되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이용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생물체 설계의 이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도구,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다.” 

조너선 화이트는 흄의 감성이란 말 대신 직관이란 말을 더 즐겨 쓴다. 즉 인간은 감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직관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뜻이다. 조너선 화이트 교수는 말한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낯선 사람 다섯을 구하는 게 나은가, 아니면 하나를 구하는 게 나은가? 아니면 추론을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보다 다섯을 구하는 게 낫다는 사실은 그저 바로 알아진다. 이렇듯 우리가 순간순간 별 노력 없이 내리는 도덕적 판단은 매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에 이르는데,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 바로 직관이다.” 이를 조너선 화이트 심리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 《바른 마음》에서 이 두 종류의 인지 (이성과 직관)에 각각 기수와 코끼리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말(馬)대신 코끼리를 선택한 이유는 코끼리가 말보다 훨씬 큰 덩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그리고 더 영리하다고) 인간의 마음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기수(통제된 인지 과정)가 코끼리(자동적 인지 과정)의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기수는 코끼리의 시중을 들어주도록 진화했다. 조너선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직관이 먼저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 


지난 5억 년 동안 동물의 마음을 움직여 온 것은 자동인지 과정이었고, 그렇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도 움직여왔다. 따라서 수천 번의 제품 주기를 거친 소프트웨어가 기능이 향상되듯이, 자동적 인지 과정은 이제 자신의 일을 매우 능숙하게 처리해내는 단계에 있다. 인간이 언어 및 추론을 발달시킨 것은 최근 100만 년 사이의 어느 즈음인데, 이 때  뇌가 스스로 회로를 재구성한 일은 해서 코끼리 등에서 기수를 내리고 그 자리에 어설픈 신참 마부를 앉힌 일은 없었다고 화이트는 말한다. 오히려 기수(언어를 기반으로 한 추론능력)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진화해나갈 수 있었는데, 기수가 어떻게든 코끼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화이트에 의하면 기수는 코끼리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기수는 코끼리가 무슨 일을 저질렀든 사건을 사후 조작하듯 설명하는 기술이 뛰어나고, 코끼리가 앞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 정당화의 근거를 잘 마련한다. 코끼리 입장에서는 24시간 내내 일하는 이 홍보 회사를 태우고 다닐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는 뜻이다. 

이 주장은 흄의 모델에 사회성을 추가한 화이트의 사회적 직관주의자 모델이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이에 대한 실험이 드류 웨스턴에 의해 실행됐다. 그는 fMRI를 통해 사람들의 뇌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모습을 포착해보았다. 

피험자들은 위협적인 정보(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의 위선적 행동)를 접하자 감정과 관련된 뇌 영역(처벌에 대한 부정적 감정 및 반응과 관련된 영역)이 곧바로 활성화되었다. 반면 냉철한 이성적 추론을 담당하는 배측 전전두엽(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 : diPFC)활동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이성적 존재라면 피험자들은 위협적인 정보를 받아들일 때 배측 전전두엽이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웨스턴이 피험자들을 위협에서 해방시키자, 뇌의 배쪽 선조(ventral striatum)가 웅 하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쪽 선조는 뇌의 보상 중추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모든 동물의 뇌는 그 동물이 생존에 뭔가 중요한 일을 하면 순간순간 기쁨을 일으키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이 기분 좋은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배쪽 선조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다. 헤로인이나 코카인 등의 물질에 우리가 중독되는 까닭도, 이 물질들이 도파민 반응을 인위적으로 일으키기 때문이다. 

웨스턴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피험자들이 자신의 지지 후보에 대해 신뢰를 회복하는 순간에 뇌에서 바로 이 도파민 반응이 약간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패러다임을 깨는 순간이었다. 스스로 이성적인 줄 알았는데 직관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였다니 실망스러울 법도 하다. 하지만 인간이 직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패러다임을 깬 진화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업무 수행을 동시에 처리할 때, 분명히 여자가 강점을 갖고 있음에 동의한다. 대신 남자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힘이 크다. ebs 다큐멘터리 《남과 여》에선 이를 증명하는 실험이 이뤄졌다. 10분 동안 남녀 대학생들에게 택배 받기, 아기 돌보기, 전화 받기, 토스트 꺼내기 등 집안일 8가지를 완수하라는 미션이 주어진다. 남성들은 8가지 일을 모두 처리하는데 평균 13분 52초, 여성은 9분 56초가 걸렸다. 

반면 운전 경력이 비슷한 남녀에게 주차 능력을 테스트 했을 때 남성은 평균 43초, 여성은 평균 3분 1초가 걸렸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이를 진화심리학에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농사를 짓기 전 인간의 조상들은 머나먼 과거부터 혹독한 자연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냥, 수렵과 채집에 의존해야 했다.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상대적으로 남자는 사냥을, 사냥 능력이 부족한 여자는 수렵과 채집에 집중했다. 사냥을 할 때 가장 중요시 되는 능력은 집중력이다. 사냥감을 찾고, 들키지 않게 추적해야 하고, 빈틈을 놓치지 않고 사냥에 성공해야 한다. 한시도 사냥감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된다. 사냥감에 대한 집중도가 사냥의 승패를 좌우하고, 사냥의 승패는 생존 문제에 직결된다. 

수렵과 채집을 생각해보자. 당시 수렵과 채집은 지금처럼 낭만적이지 못했다. 나무 열매나 풀뿌리를 캐낼 때 여자들은 등 뒤에 맹수가 달려들진 않을까, 어디엔가 웅크리고 있는 독사를 건들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휩싸였다. 당시 여성들은 수렵과 채집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수렵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선 주변을 항상 주의 깊게 살펴야했다. 즉 남자는 한 가지에 집중하게 진화했고, 여자의 경우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능력이 특화됐다.  


생존에 적합하게 진화한 유전자는 지금도 우리를 조종한다.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동차와 절벽 중 무엇이 더 무서운가? 대부분의 사람은 절벽을 더 끔찍하게 생각한다. 자동차로 사망하는 사람이 훨씬 많고, 실질적으로 자동차가 더 위험함에도 왜 우리는 평생에 몇 번 볼까말까 한 절벽을 더 무섭게 여기는 것일까? 그것은 250만 년 전부터 절벽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우리의 DNA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발명연대기》에 의하면 1769년 프랑스에서 증기기관을 사용하여 3륜 자동차를 가장 처음 만들었다. 그 자동차가 발전하여 대중화 된 시기를 1908년 헨리 포드가 개발한 850달러 모델T로 보고 있다. 즉 자동차가 우리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 DNA에 고작 150여년 밖에 쌓이지 않았다. 반면 학자마자 조금씩 다르지만 인류의 조상을 최초의 인류라고 인정되는 종(種)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다. ‘남방의 원숭이’라는 뜻인데 학자들은 이 원숭이 인간이 약 25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남부지방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은 약 15만 년 전에 아프리카 지역에서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적어도 우리의 DNA엔 절벽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15만년동안 축적돼 쌓여있는 것이다. 각각 그리고 모든 생명체 내부에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는 일정한 정보가 존재한다. 한정된 자원과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수의 개체들이 태어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유리하게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자.  

 

전 세계 16%의 인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환공포증 (trypophobia)은 반복되는 특정 문양에서 혐오감을 나타내는 증상이다. 이 공포증의 원인은 뭘까? 

영국 에섹스대 시각과학 전문가 제프 콜 박사와 아놀드 윌킨스 교수에 따르면 환공포증의 원인은 맹독이나 가공할 공격력을 가진 동물에 대한 두려운 기억이다. 즉, 환공포증은 인류가 진화를 거치면서 맹독을 가졌거나 몹시 사나운 동물과 마주했을 때 느낀 시각적 공포가 원인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제프 콜 박사는 “팔뚝에 깨알처럼 박힌 모래 사진만 봐도 환공포증을 일으키는 것은 인류 공통적으로 과거에 경험했던 무시무시한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두 사람은 점박이전갈이나 킹코브라 등 푸른띠문어처럼 일정한 문양을 가진 맹독성 동물들을 골라냈다. 실험 참가자들은 이 동물들의 사진을 보고 환공포증을 일으켰다. 화려한 무늬를 가진 독버섯이나 독개구리에게도 환공포증을 느끼는 이유도 우리 유전자가 과거부터 쌓인 정보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피하라고.

진화론에 의거한 인간의 해석은 흥미롭고 적합하다. 즉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다면 진화론에 대한 이해해야 한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론,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이 창조했고 신이 지배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진화론의 증거를 찾아냈고, 각 생물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더 나은 번식을 위해 진화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종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의 전쟁으로부터,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함 목표, 다시 말해 보다 우월한 동물들의 생산이 곧바로 뒤따른다.’ 

마틴 노왁과 로저 하필드의 《초협력자》 서문 ‘투쟁’편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생물계에는 음지가 있다. 찰스 다윈은 자연의 이러한 응달을 생존투쟁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경쟁이 진화의 바로 한가운데 있음을 깨달았다. 적자 (The Fittest)는 이 끝없는 “가장 혹독한 살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고, 이외의 것들은 사라진다. 그 결과 오늘날 기어 다니고 헤엄치고 날아다니는 모든 피조물들은 과거에 성공적으로 번성하며, 불운했던 경쟁자들보다 많이 번식했던 조상들을 가지고 있다.’ 현재 존재하는 우리는 과거 조상들이 겪었던 경험들, 특히 생존에 적합한 정보들을 디오시리보핵산(deoxyribonnucleicacid), 즉 DNA에 새기고 있다는 뜻이다. 소수의 바이러스들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그 번식에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DNA에 의존한다. DNA는 유전 물질인 RNA로 바뀌게 되는데 이들은 DNA보다 유연하다. RNA는 다음 세대로 정보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화학 반응의 촉매 –그 속도를 증가시키는- 작용도 수행할 수 있다. 

진화론에 의해 어떤 특징이 인간 안에 내장되거나 보편적이지 않아도 선천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신경학자 게리 마커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자연에서 받은 뇌는 상당히 복잡한 상태이지만, 그 안에 이미 다 갖춰져 있어 고정불변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보다 채 갖춰지지 않아 융통성이 있고 또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제일 좋다. 자연이 초고를 주면, 경험이 그것에 수정을 가한다. ‘내장’이란 말은 변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경험 이전에 구조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DNA의 발견은 인간이란 존재를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학자들은 이 두 가지 무기로 인간을 더 면밀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많은 학자들이 그토록 궁금해 했던 인간의 본성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행동들 말이다. 특히 ‘이기적 유전자’라고 불리는 인간의 협력에 관해서 말이다.

  

DNA가 발견하기 전 인간의 협력을 날카롭게 통찰한 자가 있었으니 17세기 철학을 이끈 토마스 홉스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성악설로 정의했다. 홉스는 1642년(54세) 파리에서 익명으로 출간한 자신의 저서 《시민론》에서 ‘사람은 사람에게 있어서 늑대이다(homo homni lupus)’로 밝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인간의 자연상태(근대의 사회계약설에서 국가의 성립을 설명할 때 전제가 되는 상태. 요컨대 정치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로 규정했다. 홉스가 생각한 자연상태는 격정과 적의에 의해 산출된 폭력적 충돌의 상태였다. 그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더럽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이고, 불안하고, 야비하고, 시끄럽고 … 그리고 ‘짧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치명적 위험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철저하게 반사회적인 성향을 극복하게 하여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게 한다. 

1651년(63세) 5월 홉스의 대표작 《리바이어던》 2부 국가론 제 1장에서 그가 생각하는 자연상태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우리는 편파성, 자만심, 복수심 및 그와 유사한 것으로 이끌어가는 우리의 자연적 정념이다.  … 인간이 소가족으로 생활한 모든 곳에서는 서로 강탈, 약탈하는 것이 본성이다. 왜냐하면 공동의 적이 없을 때에는 그들 각자의 이해 때문에 서로 투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회 계약론, 즉 인간이 사회를 만드는 이유를 짧은 인간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처참한 전쟁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는 안목이라고 해석했다. 

‘인간을 외적의 침입과 상호간 상해로부터 방해할 수 있는 국가를 수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 자신의 노력과 대지의 열매에 의해 그들 자신을 자리게 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은, 그들 모두의 권력과 힘을 하나의 인물 또는 한 집단의 인간들에게 부여해서 그들 모두의 의사를 다수의 소리에 의해 단일 의사로 만드는 것이다.’

이기적 개인들이 집단을 만드는 이유는 자연상태에선 그들의 삶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약을 통해 (민주적인 집단은 아니지만) 사회를 형성해서 군주와 법에 의해 우리는 보다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비록 홉스는 진화론이나 DNA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지만, 시대를 앞서간 사람답게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사실과 이기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회를 만드는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해석했다. 홉스의 주장 이후로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하고 1970년대 뇌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해석은 가속 폐달을 밟는다. 


플라톤에서 시작한 이성은 칸트,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칸트를 만나면서 진일보했고 그들의 이론은 무너질 줄 몰랐다. 그러나 진화론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철옹성 같았던 그들의 주장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과학자들은 많은 이들이 그토록 궁금해 했던 인간의 군집성, 왜 이기적 개인이 집단을 이루고 이타적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답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찾기 시작했다. 

엠허스트 소재 매사추세스 대학교에 있는 린 마굴리스는 미생물체 수준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종류의 협력을 밝혀냈다. 그녀는 보다 복잡한 ‘고등’ 세포들은 공생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단세포 생물들이 매우 가깝게 어울려 마치 하나인 것처럼 작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략 18억 년 전 한 박테리아가 다른 종류를 침입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물론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아마도 이 침입자는 먹잇감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생적 침입이 양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고 두 당사자들이 장기적이고 조화로우며 생산적인 휴전 협정을 맺는 형태로 진화했다. 이는 마굴리스가 공생 발생(symbiogenesis)이라고 칭했던 것으로 진핵생물류(Eukarya)로 알려진 고등 세포들의 형성을 낳았다. 


이러한 협력 덕분에 지구 위에 새롭고 보다 복잡한 종류의 세포가 등장했다. 원핵생물(prokaryotes)라 불리는 박테리아 세포들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반면, 진핵생물류로 알려진 이 새로운 세포 연합체는 인간들을 포함한 식물과 동물의 구성단위가 되었다. 이 세포들은 DNA가 담겨 있는 세포핵을 포함하여 세포 소기관들을 지니고 있는데 이 세포 소기관들이 바로 미생물계에서 발생한 통폐합 초창기의 역사가 남긴 잔재라고 《초협력자》는 설명한다.  

기나긴 세월에 걸쳐 이러한 공생은 새로운 생명체를 형성했고 그 결과 개, 고양이, 인간 같은 다세포 유기체로 진화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협력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이런 경험은 DNA에 쌓여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협력이 상위 생존전략임을 알고 있다. 영겁의 세대를 거쳐 체득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자신의 《인간의 유래 (The Descent of Man)》에서 집단선택(동물의 이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생겨난 개념으로, 종 내의 어떤 집단은 서로에게 이타적이고 어떤 집단은 그렇지 않을 경우 이타적인 집단이 살아남고 비협동적인 집단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먼 옛날 원시시대, 한 나라 안에서 부족 둘이 서로 경쟁을 벌였다고 해보자. 만일 (다른 상황은 모두 똑같다 치고) 한 부족의 구성원이 대체로 용감하고 자애로우며 신의가 두터웠다면, 그래서 서로가 위험에 처했을 때 언제든 나서서 알려주고 망설임 없이 늘 서로를 돕고 지켜주었다면, 이 부족이 더 큰 성공을 거두어 다른 부족을 정복했을 것이다. … 이제껏 군대의 역사를 봐도 기강이 단단히 잡힌 병사들이 기강 없는 어중이떠중이보다 더 유리했던 것이, 전자는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자기 동료를 믿기 때문이다. …… 이기적이고 잘 다투는 사람들은 하나로 단결하지 못하며, 단결심 없이는 그 무엇도 달성될 수 없다, 앞서 말한 특성들이 풍부한 부족은 그 세력을 넓혀 다른 부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을 것이다.’ 

그리고 다윈은 집단선택에 반론으로 제기되는 이른바 무임승차자의 문제를 꺼낸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사회적이고 도덕적 자질을 갖춘 구성원이 한 부족 내에 많아지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아가 부족이 훌륭한 자질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가령 부족 내에 동정심이나 자비심이 더 많았던 부모, 혹은 동족 친구들에게 누구보다 충직했던 부모가 있었다고 치자. 이런 사람들의 자식이 같은 부족 내의 이기적이고 배반 잘하는 부모들의 자식에 비해 더 많았을 거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동족의 친구들을 배신하지 않고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옛날 야만인 중에는 이런 이가 많았다.)은 자식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을 테고, 따라서 자신이 가진 그 고결한 본성도 물려주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역사적으로 무임승차는 그다지 매력적인 생존 방식은 아니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리를 이루는 것이다. 한 무리 안에도 수많은 집단이 존재한다. 나라 안에 존재하는 정당, 회사, 동문, 가족 등의 집단 말이다. 무임승차자는 다른 집단 내에서 배척될 것이고 그들의 생존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진다. 평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무임승차자들은 고용주가 될 사람은 물론 그들의 유전자를 복사해 줄 여자(혹은 남자)들에게도 선택될 가능성은 없다. “함께하는 일”에 발맞추지 못하고 더 이기적이며 혼자 생활하기 좋아하는 유기체는 모두 주류에 서지 못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체 곤충 중에 집단생활을 하는 곤충들은 단 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등장과 함께 섭식 및 번식에 제일 좋은 땅을 차지하고 경쟁자들은 변방으로 밀어내 버렸다. 오늘날 군체 곤충은 무게로 따지면 전체 곤충의 절반을 넘는다. 만약 인간도 사회를 이루지 못했다면 지구의 패권을 곤충에게 넘겨줘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리를 형성하고 개인의 이기심을 억누르면서 인간은 다른 포유류를 멸종시키거나 복종시켰다. 협력은 최초의 박테리아 세포를, 그리고 고등 세포를, 그리고 복잡한 다세포 생명체와 곤충의 초유기체를 세웠다. 마지막으로 협력은 인류를 낳았다. 


미시간 대학교의 로버트 액설로드는 협력 및 관용과 배반 사이의 매커니즘을 확인하기 위해 ‘죄수의 딜레마’를 기본으로 한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실험은 컴퓨터를 통해 진행되는 가상 경합이었다. 세계 연구자들이 엑설로드에게 14개의 프로그램을 보내왔다. 실험의 경합을 모두 통틀어 액설로드는 12만번의 전략과 24만 개의 상호 작용을 탐구했다. 

많은 이들이 가장 ‘긴’ 프로그램이 가장 ‘영리’(즉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장 단순한 선수가 승리를 거두었다. 우승자는 다름 아닌 아나톨 라파포트가 작성한 고작 네 줄짜리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협력으로 시작해서 그 이후에는 상대방의 이전 전략을 그대로 따라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상대방이 배신했을 때에만 나도 배신하게 된다. 

이 실험의 결과는 우리에게 한 가지 가르침을 준다. 즉 먼저 배신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전략이 흥미로운 까닭은 이것이 상대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 이외에는 상대에게 원한을 품지 않는 데에 있다. 따라서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제공하게 된다. 만일 상대가 타협할 줄 아는 존재라면 둘은 협력이라는 결과를 거둬들일 수 있다. 

여기서 《초협력자》 저자는 엑설로드의 작업을 보다 현실화하기 위해 잡음의 효과를 고려하고자 했다. 그가 생각한 현실화는 우연의 요소였다. 우선 그는 확률을 다르게 조작한 용서를 프로그램화했다. 어떤 전략은 2분의 1 확률로 상대방의 배신을 용서하고 다른 전략은 5분의 1확률로 상대방을 배신하는 식이다. 물론 어떤 전략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에선 실수나 피치 못할 사정,  혹은 불분명한 기억이나 착각 때문에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항상 배신하는 전략’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지배한 것은 협력에 대해서는 협력으로 응하되, 배신에 대해서는 세 번에 한 번꼴로 협력이라는 용서로 응대한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용서를 베풀 상대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용서는 확률적으로 구사된다.) 이 전략을 기본 지침으로 한 집단이 변이를 일으켜서 점차로 관대한 전략으로 향하는 것이 관찰됐다. 결국 언제나 협력하는 전략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게 됐다. 하지만 재밌게도 완전히 친절한 전략이 세상을 지배한 후 끝까지 살아남은 악랄한 배신자들에 의해 붕괴되고 배신자들에 의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내몰리게 됐다. 물론 시뮬레이션을 계속 돌리다보면 배신자는 다시 배척되고 다시금 집단을 이루고 협력하는 사회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돼왔고 반복 될 것이다. 

희소식은 가장 많은 기간을 점유하는 전략은 협력으로 응하되, 배신에 대해서는 세 번에 한 번꼴로 협력이라는 용서로 응대한 전략이라는 사실이다.   

 

집단생성을 선호하는 인간의 본성은 옥시토신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시상하부에서 만들어내는 호르몬이자 신경전달물질인 옥시토신은 척추동물이 임신을 하고 새끼를 기를 때 분비가 극대화 되는 물질이다. 포유류의 경우 옥시토신의 영향으로 모성애는 물론 자궁이 수축되고 유즙 분비도 활성화 된다고 알려져 있다. 새끼를 잘 돌보거나 유독 제 짝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수컷이 옥시토신에 더 잘 반응하도록 개조된 뇌를 갖고 있다. 타인을 신뢰할 때, 혹은 타인의 신뢰를 받는 경우 둘 다 옥시토신 수치가 증가했고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거나 그를 도우려는 욕구를 가진 사람에게도 옥시토신 수치는 증가했다. 더불어 우리 뇌는 상대방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을 때 옥시토신을 더 많이 분비하는데, 낯선 사람이 내 등을 주무르는 정도에도 이런 효과는 나타난다. 옥시토신의 기능은 우리가 파트너 및 집단과 뭉치게 만들어 줌으로써 타 집단과의 경쟁에서 더 효과적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연구 결과 신경생물학적 기제는 전반적으로 (특히 옥시토신 관련 체계) 내부 집단과의 조화와 협동을 유지하고 꾀하기 위해 발달했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옥시토신이 우리를 인류 전체와 엮어주진 못하지만 이기적 개인을 집단으로 묶어주는 데는 성공했다.   

인간의 협력을 게임이론 및 자연과학에 기초해 연구하고 서술한 《초협력자》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말한다. ‘협력이 최고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기심과 협력, 심리 등을 연구한 조너선 화이트의 《바른 마음》 끝에선 말한다. ‘우리는 어차피 한동안은 이 땅에 다 같이 발붙이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서로 잘 지낼 수 있게 함께 노력해보자.’ 

협력의 메커니즘은 개미와 벌, 박테리아 군란, 악어와 악어새 등 여타의 동물 사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동물 종도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협력의 메커니즘을 끌어내진 못했다. 배신자를 처벌하는 대신 성공적인 협력에 보상을 베풀면 우리는 협력적 노력을 통해 더 나은, 혹은 진정한 창조와 혁신을 이끌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역사는 진보했고 사회라는 집단을 잉태했다. 

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90%는 침팬지와 비슷하지만, 나머지 10%는 벌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기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다.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소리를 50년 세월동안 들어야 했지만 희망적이게도 실제론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의 이익을 늘려가는 데 쓴다는 건 사실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에게는 분명 개인의 이익을 초월해 그저 전체의 일부가 되는 능력과 본능이 잠재돼 있다. 


또한 앞선 실험을 통해 우리는 관용과 배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결국 우리에게 더 큰 이득을 가져다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화론이나 생물학 뿐 아니라 경제학에서도 신뢰의 힘을 인정했다.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의 중요성을 제기한 미국의 정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국가는 거래비용을 줄이고 대규모 조직에서 구성원들로 하여금 서로 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국가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신뢰수준은 통계적으로 유의한 양의 계수를 갖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뢰가 높아짐에 따라 1인당 실질GDP의 증가율로 측정한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고선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의 한국경제연구원의 연구 역시 신뢰가 소득수준 및 경제성장률에 양의 효과를 갖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뢰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혁신 활동의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사회의 일반적인 신뢰 수준은 총 요소생산성과도 양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신뢰가 생산성 제고를 가져오는 다양한 혁신활동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뢰수준이 높아지며 거래비용이 낮아질 때 투자 규모가 더욱 커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혁신활동에 대한 투자도 늘어날 수 있다. 실제로 일반적인 신뢰 수준이 높게 나타날수록 GDP 중 연구개발(R&D)을 위해 이루어진 지출액의 비중 역시 크다. 미국의 주 단위 자료를 살펴보면 주민들의 일반적인 신뢰 수준이 높을수록 특허건수도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누구인가 곧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은 사칙연산처럼 간단하게 적기 힘들다. 우리는 이기적인 동시에 집단을 이루면서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앞서 밝혔듯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호모 듀플렉스다. 우리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사회에 있고 어떤 교감을 사회 구성원들과 공유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두 가지 본성의 무게 중심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답은 정해져있다.   

협력, 신뢰, 통합이 우리의 생존을 진일보시키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핵심 동력의 연료로 우리는 공감을 사용한다.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 거울 뉴런 및 DNA의 정보 등을 통해 우리는 타인과 공감하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한다. 프란시스코 교황에게 세계가 열광하는 이유는 교황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 코끼리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가 1년 전 한국에서 말씀하신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라는 발언 역시 우리 마음 속 기수가 이해하기 전 코끼리가 먼저 반응하고 움직인다. 


시선을 좁혀 한국 사회를 돌아보자. 언젠가 외국에서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한국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박물관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근대사 파트의 유물을 봤을 때 그들이 본 유물은 나막신, 짚신, 가마 따위의 물건이었다. 유물을 본 후 외국인들이 말했다. “이 박물관의 유물 설명 표지판이 틀렸군요. 나막신, 짚신 같은 물건이 1940년으로 표기 돼 있어요. 1490년으로 표기돼야 하는 데 말이죠.” 이를 들은 한국인이 답변했다. “아닙니다. 제대로 표기된 게 맞습니다. 1940년에 사용한 물건들입니다.” 이에 외국인은 경악하며 물었다. “그럼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대한민국이 고작 60년 동안 이렇게 대단한 성장을 이룩한 겁니까?”

한국인이 생각해도 대단한 성취를 외국인의 눈으로 봤을 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겠는가. 이 짧은 시간에 빈곤과 압제에서 벗어나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의 대열에 들어간 사실은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에는 격렬한 정치 분열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지역, 성별, 연령, 빈부, 정치로 인해 여러 면에서 분열하고 편 가르는 형국이다. 이런 분열을 끝내고 우리가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룩하려면,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고 길게 생존하려면, 분열을 끝내고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신뢰, 공감, 배려, 관용을 베풀면 집단이 형성되고 집단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많은 실험과 역사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잖아요?” 

로드니 킹의 간곡한 호소처럼 결국 우리는 함께 가야할 운명이다. 혼자 가면 멀리 가지 못한다.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방법은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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