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이론<Bigbang Theories>
장르는 계절을 탄다. 봄과 가을에는 아련한 멜로가, 여름에는 공포나 스릴러가, 겨울에는 로맨틱 코미디가 흥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계절을 잘 타지 않는 장르가 하나 있다. 바로 코미디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나 누군가가 내게 ‘재밌는’ 미드나 영드를 소개해달라고 할 때면 늘 주저 없이 <빅뱅 이론>을 추천하곤 했다. 이 드라마는 2007년 시즌 1을 시작으로 매년 새 시리즈로 팬들을 찾아오는 미국의 최장수 시트콤이다.
한때 투피엠이나 블락비 같은 ‘짐승돌’에 열광했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강인하고 힘이 세 보이며, 온몸이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남자가 인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물론 야성미 넘치는 남자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짐승돌' 못지않게 대세로 떠오르는 남자들이 있다. 이름하여 ‘너드(Nerd) 남’ 되시겠다. 너드남은 ‘공부 밖에 모르고 찌질 해 보이는데 멋있는 남자’다. (너드남의 조건을 알고 싶다면 이 포스팅을 보시길) 요즘은 너드남 대신 ‘뇌섹남’이라는 명칭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추세다.
‘너드’의 매력은 패션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몇 년간 청년들 사이에서는 ‘너드 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패션잡지 보그에 의하면 최소한 앞으로 몇 년간은 너드 룩이 대세일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너드’는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어느새 '청순미'의 유의어인 '너드미(美)'라는 명칭까지 생겨났다. 티브이에서도 이 美를 발산하고 매력 포인트로 잡는 연예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오늘 소개할 <빅뱅이론>은 이 너드미를 마구 발산하는 4명의 남자들과 이웃집 여자의 일상을 담고 있는 시트콤이다.
• 셸던 리 쿠퍼(Sheldon Lee Cooper)
이론물리학자. 매우 명석하며,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천재성을 강조하며 남을 깔보는 매우 거만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지만, 아스퍼거를 앓고 있어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미숙할 뿐이다. 자신의 강박적인 행동 규칙을 남들에게 강요한다. 만화와 영화를 매우 좋아하며, 새 만화책을 차지하기 위해서 친구와의 신경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드라마 설정상, 드라마의 무대가 되는 캘리포니아공대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CALTECH) 박사학위 소지자로 추정된다.
• 레너드 리키 호프스태더(Leonard Leakey Hofstadter)
실험 물리학자, 쉘든의 룸메이트. 실험 물리학자라는 이유로 쉘든에게 종종 무시를 당하며, 늘 자신의 행동 규칙을 강요하는 쉘든에게 시달린다. 시즌 3부터는 페니와 커플이 된다. 드라마 설정상,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명문대인 Princeton에서 박사학위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 페니(Penny)
쉘든과 레너드의 이웃집에 사는 여성. 쉘든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쉘든과의 대화에 늘 어려움을 겪으며, 때로는 쉘든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 하워드 조엘 왈로위츠(Howard Joel Wolowitz)
유대인 출신의 MIT 공학 석사 출신의 엔지니어. 어머니와 같이 살며, 늘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자를 보면 항상 먼저 달려드나, 주책없는 말로 인해 제대로 된 연애는 하지 못한다. 드라마에서 우주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담당하며, 우주에 다녀온 우주비행사다.
• 라제쉬 라마얀 쿠스라팔리(Rajesh Ramayan Koothrappali)
인도 출신의 천체물리학자. 항상 부모님의 간섭에 시달리며, 특히 여자 앞에서 입도 열지 못하는 성격 탓에 연애에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시즌 6에서 여자와 말할 수 있게 된다. 영국 Cambridge 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을 취득하고, CALTECH에서 천체물리학 전공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웃이 되지 않았더라면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주인공들은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접점을 넓히고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시즌 1 때에 비하면 주인공들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사람의 외형만 보고 성격을 단정 짓고 무시하던 페니는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게 되었고, 사회성 부족에 온갖 혐오 발언을 일삼던 4인방은 남들과 공존하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에, 일부 팬들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등장인물들이 일명 캐붕(캐릭터성의 붕괴)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초장기 주인공들의 모습을 돌려 내라며 그때의 그 성격을 그대로 시리즈를 연장할 것을 요구한다. 초창기 주인공들의 성격과 그로부터 벌어지는 사건이 나올 때가 가장 재미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캐붕이 일어난 걸까? 그래서 드라마가 재미 없어진 걸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우선, 입체적인 캐릭터는 정말 중요하다. 그 캐릭터가 여러 개의 시리즈로 구성된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초심을 잃는 게 아니다. 발전하고 있고, 시청자의 피드백을 수용한다는 증거다. 물론 성장 서사 속에서 정말로 ‘캐붕’이 되는 캐릭터도 있다. 영드 <셜록>이 그러한 편이다. (이 드라마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4월 중에 다룰 예정이니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다.)
개인적으로 <빅뱅 이론>은 시즌 3-1-2-4-5-6-7-8-9-10-11 순으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왜 시즌 3부터 봐도 무방하냐면 이때 시즌 1과 2의 전체 줄거리를 아우르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을 관계도는 시즌 3의 1화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즌 1이 워낙 예전에 만들어져서 보기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단순히 화질이 나쁜 걸 보기 싫거나 재미가 없을까 봐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가 주(主)라고 생각한다. 이는 <빅뱅 이론>이 거센 혹평을 받았던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최고의 숫자는 5318008이야. 계산기에 이 숫자를 치고 뒤집어보면 BOOBIES(가슴)가 나온다고.”
바로 ‘사회성이 떨어지고 약자를 물리적으로 해 할 만큼 힘이 세지 못한 너드이기 때문에 그들의 혐오 발언을 웃어넘길 수 있는 유머로 연출하는 방식’ 때문이다. 이에 한 외국 유튜버는 이렇게 비난했다.
매력적인 성차별주의자들은 코믹 하면서도 불쌍하고 사랑스러운 프레임으로 꾸며진 너드 버전의 (폭력적인) 남성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 그리고 각양각색의 소름 끼치는 행위와 명백히 성차별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그들이 ‘괴짜’ 같은 착한 남자들이라는 지위에 있다. (…) 거칠고 공격적인 형태의 남성들과 비교해서 볼 때, 우리의 괴짜 영웅은 더 낫고, 영리하고, 더 민감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인물들이 여성들이 우려하는 다양한 괴롭힘, 성차별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여성들을 스토킹을 하고, 몰래 엿보거나, 거짓말을 하며, 그들의 삶에서 여성들을 조종하려고 한다.
그들은 고압적이다. 그들은 거절에 대한 대답을 거부하고 기본적인 동의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 이러한 행동들의 대부분은 성희롱의 범위에 해당되며, 때때로 그것은 성폭행의 수준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 이런 종류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져야 한다. 내 말은, 이런 행동들이 TV 쇼와 영화를 구성하는 틀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 이런 행동이 한심하게 그려지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무해하게 그려지고 심지어 사랑을 받기도 한다. (…) 이 쇼에 나오는 4명의 괴짜 친구들은 호감형 인간으로 그려져 있다. 심지어 그들은 진심 어린 세심함 모습과 사려 깊고 다정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 이 비 위협적인 모습과 사랑스러움은 해로운 부분을 변명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빅뱅 이론의 네 명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각자 뚜렷하게 갖고 있는 매력적인 여성 혐오의 특징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빅뱅 이론은 어떻게 이렇게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하는 남자들에게 우리가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음, 그 답은 아이러니한 유머와, Lamp Shading(코미디 연출가들이 기존의 인종주의, 성차별 등 쉬운 유머를 사용하고 싶을 때 흔히 쓰이는 것으로, 각본가들이 이러한 유머 코드를 쓰고 싶어 하는 본인의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고 반대로 과장하거나 드러내는 경우를 말함) 하는 걸로 유명한 작가의 트릭에 있다. (…) 빅뱅 이론에 관한 대부분의 농담은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괴짜들은 우리가 예상하는 성차별 주의자들이 지닌 남성성의 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유형의 행동을 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된다. 대신, 이 웃음거리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충분히 지니지 못한 사람에게로 향한다.”(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X3-hOigoxHs)
전문의 요지는 대략 이러하다. 연출자들은 인종차별, 성차별적인 유머는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굳이 이 소재를 이용하고 싶어 하고, 그렇기에 자신들이 피씨 하다는 점을 어필한다. 문제는 이 어필하는 방식이 일부러 차별적인 언행들을 과장시킨다는 거고, 이걸로 시청자들을 웃음의 장에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백인 주인공이 흑인인 친구에게 “네가 몇십 년 전에 태어났다면 넌 지금쯤 우리 집 앞 농장에서 목화솜을 따고 있겠지”라는 대사를 치고, 어이없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백인을 바라보는 흑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식이라는 거다. 드라마에서는 매번 이런 식의 유머를 내보인다.
사실 그보다 더욱이 문제인 건, 위에서 예시로 든 장면이 “성차별, 인종주의 유머는 정말 웃기니까 소비해도 괜찮아!”가 아니라 “성차별, 인종주의 유머는 해로워”라는 이미지를 준다는 점이다. 그 어떤 혐오 발언도 귀엽거나 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초기 <빅뱅 이론> 시리즈에서는 혐오를 내재한 언행에 대한 비판을 이런식으로 자꾸만 무력화시킨다.
혹평이 점점 거세지자, 시즌 3부터 작가는 각본 집필에 더 공을 들였다. 차별과 편견을 기반으로 한 유머 코드를 조금씩이나마 배제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상을 ‘캐붕’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코미디는 무엇에 뿌리를 둔 유머를 사용하냐에 따라 코미디의 질이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빅뱅 이론>은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제작 방식도 언제나 시청자를 중심으로 한다. 타 시트콤은 영상에 웃음소리를 넣기 위해 특정 음향효과를 입힌다. 반면에 <빅뱅 이론>은 방청객을 드라마 현장에 초대해 녹화 장면을 공개하며, 방청객들의 웃음소리를 녹음한다. 영상에 입혀진 웃음소리와 박수소리는 특정 음향효과가 아니라 실제 방청객들의 반응이다. 이것은 요즘에는 잘 쓰이지 않는 구식 즉, 전통적인 시트콤 제작 방식이다. 배우가 관객들과 가까이서 호흡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가 꼭 연극 같다고 느껴진다. 오로지 연출과 연기의 힘에 의존하며 시청자와 최대한 가까이에서 교감하는 것. 아마도 이 두 가지가 <빅뱅 이론>의 장수 비결이 아닐까.
별점 : ★★★★☆(4/5)